매일신문

세자녀 장학금만 25억원! 그 어머니 황경애를 배우자!

▲ (사진 가운데)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 최성찬, 황경애, 은희, 은혜씨.
▲ (사진 가운데)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 최성찬, 황경애, 은희, 은혜씨.

"저도 황경애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국제적인 영향력을 지닌 글로벌 인재로 제 자녀를 키울 수 있는지 배우고 싶어요."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2천500만원도 큰 돈인데, 세 자녀가 무려 '25억원'의 장학금을 받았다니 정말 믿기지 않아요. 꼭 찾아 뵙고, 그 비법을 배우고 싶어요."

전국에 '황경애 바람'이 뜨겁다.

미국 애틀란타에 거주하는 황경애(미국명 에스더 최)씨는 지난달 11일 국내에 들어온 지 꼭 한달만에 전국에서 러브콜이 쇄도, 대구 서울 수원 인천 평택 안산 등지에서 이미 20여 차례 교육특강을 가졌고, 국내 체류하는 5월말까지 ▷대구과학고(17일) ▷대구 학남중(23일) ▷경주 선덕여중고(25일) ▷대구외고(27일) ▷포항 안디옥교회(29일) ▷대구 동아쇼핑 문화센터(30일) ▷주디유치원(4월9일) ▷영운초교(17일) ▷경주 근화여고(4월 29일) ▷칠곡 교육문화복지회관(4월 30일)▷대구제일교회(5월17일) ▷대구삼일교회(17일) ▷포항중앙교회(22일) 등에서 40여 차례 특강을 더 열 예정이다.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던 황수관의 '신바람 건강학'이나 이상구 박사의 '엔돌핀론'을 능가하는 열기이다. 왜 황경애인가?

◈ 글로벌 인재로 자라는 세 자녀

혼자 몸으로 세 자녀를 미국 정부가 주목하는 인물로 키우고 여성, 황경애.

황씨의 장녀 은혜양은 보스톤대학 국제정치학과를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백악관 인턴십을 거쳐서 미 정부 장학금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유학을 다녀왔다. 지금은 미국 10대 로펌에 근무하는 예비 법조인이다.

장남 성찬군은 보스톤대학 4년 전액 장학생이면서 미국내 800만명 대학생 가운데 딱 32명만 뽑는 외교관 특별 프로그램 펠로우십(10만 달러)을 딴 예비 외교관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5년이 지나면 외무고시를 거치지 않고 외교관으로 국제무대에 서게 된다.

막내딸 은희양은 하버드대 4년 전액 장학생이면서 빌게이츠 재단 백만달러 장학금을 받고 있다. 세 자녀가 미국 정부나 빌게이츠 재단 그리고 대학 등으로부터 받는 장학금만 해도 모두 170만 달러(25억원 이상)가 넘는다.

◈ 25억원을 탄 세 자녀는 공부중독자일까?

요즘 같은 불경기에 무슨 투자를 하면 25억원이 넘는 돈을 탈 수 있을까? 어디에 투자하면 이런 목돈을 만질 수 있을까? 170만 달러의 장학금을 타는 유능한 자녀로 키우기 위해 황씨는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사교육에 매달렸을까? 역설적이게도 황씨는 자녀들에게 공부하라는 얘기를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늘 자녀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사회와 나라에 좋은 영향을 주는 인물로 성장하기를 빌었을 뿐, 돈으로 자식의 재능이나 지식을 사지 않았다. 그렇다고 앉아서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평탄한 결혼생활을 누리지도 못했다. 황씨의 세 자녀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그녀가 눈물과 희생과 노력과 기도로 빚어낸 빛나는 보석이다. 평범한 이들은 생각지도 못할 시련과 고통을 딛고, 혼자 힘으로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낸 황씨의 성공스토리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 세상의 엄마들은 엄청난 기적을 낳을 수 있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

◈ 경주 근화여고, 대구산업정보대(구 신일전문대) 간호학과 출신

1960년 경주 안강에서 태어나 경주 근화여고와 전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황씨는 1980년대 초반, 서울대병원 심장병 중환자실에서 특별 훈련을 받아 당시 하지스 미8군 사령관 고문의 아내와 함께 심장병 환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방한하여 심장병 환자들을 돌볼 때 봉사자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한 그녀는 심장수술을 후원한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뉴욕 롱 아일랜드 쥬이시 메디컬 센터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심장병을 지닌 다섯살배기 민영이의 사연을 수기로 써내 1982년 간호문학상을 수상한 황씨는 민영의 죽음에 너무 충격을 받고,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사우디 아라비아 왕립병원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돼 영어와 아랍어 통역을 담당했다.

◈ 엄마의 눈물을 닦아드릴께요

이후 결혼과 함께 미국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지만, 의사 아버지를 둔 목회자 남편은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국제 사기단에 걸려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날려 버린 남편은 면목이 없어서인지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아이들 먹일 우유 살 돈도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절망에 빠진 황씨는 죽음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불쑥불쑥 치밀어올랐다. 젊은 나이인데 새출발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12살인 큰딸은 이미 예민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정어머니도 말씀하셨다. "어려우면 어때? 너는 세 자녀가 있잖아. 자식이 없는 사람도 있는데, 건강한 세 아이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빈털터리로 세자녀와 세파를 헤쳐나가야할 처지가 된 황씨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저 아이들을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반듯하게 키워야지"라고 각오하고, 한알의 밀알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참아도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러 내렸다. 막내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엄마, 아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엄마는 우리 셋이 옆에 있으니까 행복하잖아. 엄마의 눈물을 제가 닦아줄께요"

◈자녀는 엄마의 뒤꼭지를 보고 배운다

황씨는 몸이 바스라져라 일했다. 퇴근해서 아이들 수업 뒷바라지와 준비물 등을 챙기고 나면 보통 새벽 2시에 잠들어서 세시간 자고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아무리 바빠도 학교 자모회를 비롯한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학교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다.

'성녀 모니카'가 흘린 눈물 위에서 위대한 성인이 된 아우구스티노처럼, 엄마가 흘린 눈물만큼 자녀들이 자라는 것일까? 강하게 살아가는 황씨를 보고 배운 것일까? 세 자녀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오히려 겸손해지고, 낮아진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자녀들은 입으로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엄마 뒤꼭지를 보고 닮는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생활을 위해 홀몸으로 비즈니스를 감당하면서도 3남매의 학교 행사에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최선을 다해 살다보니 어느새 아이들도 일등이 되어 있었다. 일등은 많지만 우선순위가 달랐다. 일등을 하기 위해 목숨걸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다보니 황씨는 시인으로 등단했고, 자녀들은 장학금을 25억원이나 타오는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고 있다. 어디 장학금 뿐인가? 자녀마다 펜싱, 배구, 피아노, 바이얼린, 기타, 트럼펫, 다이빙, 기계체조 등 스포츠 예능은 물론 봉사를 생활화하고 있다.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황씨의 세 자녀는 교육자료도 풍부하고 창의력을 위주로 가르치는 미국이라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큰 성과를 낸 것은 아닐까? 그녀의 교육원칙이 한국 가정에도 잘 접목될 수 있을까? "저는 아이들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식 학교교육에 한국식 가정 교육을 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미국 교육이 좋다면 다른 학생들도 그만큼의 성과를 내야겠죠. 한국에서도 부모가 올바른 교육법을 숙지하고 활용하면 충분히 우등생으로 키울 수 잇어요."

안강읍 출신인 황씨의 교육법은 세 아이를 키운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모름지기 부모란 아이가 가진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 황씨는 한때 애틀랜타 한인방송국의 총책임자로 한인사회에 한인라디오 방송을 정착시켰으며 이효리와 이정현, 성유리, 송대관 등 한국 유명 연예인들의 애틀랜타 공연을 성사시켜 교포 사회에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 황씨의 자녀교육 비법 엿보기

먹고 살기위해 백화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남대문 액세서리를 떼와 미국 백화점에서 팔기 시작한 적도 있다. 레녹스 몰을 비롯한 유명 백화점에서 황씨가 연 '조이 패션'은 대성황이었다. 어떤 백화점은 미국내 전 점포매장을 내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창 아이들이 자라날 때라 엄마의 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호황을 누리던 백화점 비즈니스를 접고 자녀뒷바라지에 전념한 결과, 전국민이 부러워하는 자식농사를 지었다. 결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아이들을 미국 사회가 주목하는 인재로 키운데는 황씨만의 교육원칙이 있다.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일에 투자하라 ▷아이가 집안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해라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주라 ▷공부하라고 말하지 말라 ▷실패를 가르치라 ▷외국어 교육은 어릴 때 시켜라 ▷봉사활동은 필수다 ▷엄마와의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최고의 부모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라 ▷스스로 깨닫게 하라

◈선교사가 될까, 기독교 교육자가 될까

학기가 시작되고 자녀들이 대학 기숙사로 돌아가면 엄마로서 할 일이 별로 없어 국내에 들어오는 황씨의 미래는 2가지로 수놓여지고 있다. 하나는 신학 공부를 해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 교육을 공부해 신앙안에서 자녀들을 제대로 키우는 교육자가 되는 것이다. 이미 최근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2만달러를 기부한 황씨의 생활은 단순 검박하다. 방학 때 세 자녀가 집에 있으면 된장찌개, 김치찌개, 계란찜, 갈비찜 등으로 저녁을 준비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물에 밥을 말아서 고추장 된장이랑 후루룩 마신다. 지난해 10월,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황씨를 신문사 인근의 유명한 칼국수 집으로 데려 갔다. 맛집으로 유명하기로 너무 허름한 집이어서 결례가 아닐까 여기고 있는데 의외로 너무 좋아하였다. "옛날 외할머니가 손으로 밀어주시던 그 맛"이라며 국물 한점까지 다 마신 황씨와 서로 마음결을 엮어놓은 인연으로 황씨의 전국 강연 일정은 대부분 필자가 조율하고 있다. 이번에도 국내에 체류하는 3개월 동안 무려 60여 차례의 특강을 하게 된다.

최미화 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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