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씀이는 그대로인데 수입이 줄어들었다. 생활 속에 슬픈 상념이 된다. 경제가 어렵디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데'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돈 몇푼에 자존심이 무너지는구나' 등 마음속 비애가 차오르는 경우가 너무 잦은 것.
1997년 외환위기(IMF) 때도 이렇게 생활 속 작은 부분까지 파고들었나 의구심이 든다. 사회 전반에서 개인 생활에 속속 나타나고 있는 불황의 그늘 밑 서글픈 일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소비 패턴, 가족 간 씀씀이, 선후배 관계, 남녀의 데이트 풍습, 자녀에 대한 투자 등 '왜 이렇게 됐지' 하는 마음속 서글픈 생각들을 모아봤다.
베트남에서 출생해 프랑스로 망명한 틱낫한 스님은 "깨어있는 마음이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자각하는 능력이다. 삶은 항상 현재의 이 순간에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경제불황으로 인해 틱낫한 스님이 말한 '현재 이 순간'이 슬픈 것이다.
◆문득 '내가 쪼잔해졌구나'
직장인 김성빈(35·대구시 달서구)씨는 하나뿐인 딸을 데리고 대구수목원에 갔다가 문득 '5천원에 생각이 멎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됐다. 김씨는 네 살짜리 딸을 위해 만화에 나오는 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풍선 5천원짜리와 비누방울 놀이 장난감을 사줬다. 분수대에서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열 살 정도 되는 한 남자아이가 딸의 풍선을 무단히 빼앗았다. 딸은 울음보를 터뜨렸고, '이거 뭐야' 하고 돌아보니 몸이 불편한 아이였다.
화를 내려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 그는 순간 '또 딸에게 5천원짜리 풍선을 사줘야 하는데 너무 아깝잖아, 그렇다고 도로 뺏는 것도 힘들고'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 아이를 인솔하는 지도교사가 풍선을 다시 딸에게 돌려줬는데, 나도 모르게 독백이 튀어나왔다. '아이고, 5천원 아꼈네.' 하지만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싫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진모(43)씨. 구내 매점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후배를 봤지만 지갑 속에 1만원짜리가 나오지 않았고, 호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 자신이 산 음료수값 800원만 계산했다. 후배는 미안해하며 나가는 선배에게 인사조차 하기 힘들었다. 상여금이 깎이기 전까지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때는 후배는 당연히 선배에게 미뤘고, 선배는 기꺼이 2천~3천원을 대신 내주는 게 자연스런 분위기였다.
얇아진 월급봉투 탓에 심리적으로 소인배가 된다. '야! 선배가 밥 사는데 니는 라면이라도 사야지' '2차는 니가 쏴라' '택시비 니가 내라' '대리비 있제' '(돈도 안 주고) 담배 좀 사온나' '야, 니가 팁 좀 줘라' '안주 좀 그만 무라' '야, 비싼 것 고르지 마라' 등 거시기(?)한 말들의 사용빈도가 더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서럽다.
◆데이트 등 생활패턴 바꿔놔
사귄 지 400일이 지난 김태진(33)·임은숙(30)씨 커플은 결혼을 앞둔 사이. 넉넉하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는 둘은 매월 30만원씩 내 데이트 통장을 만들었다. 분위기나는 멋진 장소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올해 초 김씨 회사에서 상여금이 나오지 않으면서 데이트 경비를 20만원으로 줄였다. 수당까지 삭감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10만원씩만 내기로 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연스레 만나는 횟수도, 메뉴 선택에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여자친구보다 월급이 적은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라며 "결혼한 이후에도 현실에 맞춰 알뜰살뜰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 커플들의 데이트 시간도 주로 낮시간대. 이들은 영화를 볼 때도 조조할인에 각종 카드할인 혜택을 활용해 1인당 3천500~5천원가량만 낸다. 점심 역시 동성로 등 도심에서 저녁시간대보다 값싼 가격으로 해결한다. 만경관, 한일극장 등에서는 평일 낮시간대 이런 커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미디어 관련 연구소에 근무하는 홍화선(36·여)씨는 어머니의 환갑을 맞아 몇 년 전부터 약속한 일주일간 미국여행을 떠났다. 본인 경비는 카드로 3개월 무이자 할부, 어머니 경비는 역시 카드로 10개월 할부로 비용을 지불했다. 어머니는 딸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홍씨는 "미국여행 다녀와서 할부 끝날 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면 된다"며 "중요한 건 어머니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라고 뿌듯해했다. 아름답지만 왠지 마음이 아리는 얘기였다.
식탁에선 '갈치 대신 고등어' '소고기 대신 콩고기' '햄 대신 소시지' '피자 대신 쨈바른 식빵' '치킨 대신 계란프라이 3개' 등 값싼 대체식품들이 오르고 있다. 주부들은 자녀들에게 반찬 또는 간식 투정을 부리면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봐라"고 피해버린다.
◆병도, 일단 땜질식 처방만
몸이 아픈 것도 엄청난 치료비 앞에선 속수무책. 근본적인 치료보다는 통증을 치유하거나 지금 상황만 넘기고 보자는 식. 의사들도 이렇게 해봐야 얼마 못 간다는 걸 알지만 환자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상구(66·대구시 중구)씨는 1년 전 오랜 시간 동안 흔들거리던 앞 치아가 게장을 먹는 바람에 '뚝' 부러지고 말았다. 거울을 쳐다보니 꼭 '상구가 아닌 영구'처럼 보였다. 앞 치아 하나가 빠져 얼굴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쳐졌다. 부러진 치아를 가지고 인근 치과로 달려갔다. 의사는 "왜 이걸 가져왔어요?"라고 물었다.
이씨는 "이걸 붙여줄 수 없느냐"고 물었고, 의사는 "붙여봤자 얼마 못 간다. 임플란트를 해봐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씨는 250만원이나 하는 임플란트는 엄두도 못내고 3만5천원을 주고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지난달 사과를 먹다 붙인 치아가 또 부러지고 말았다. 또 부러진 이를 들고 3만5천원을 호주머니에 넣어 치과에 갔다. 하지만 간호사가 이제 한 개 붙이는데 5만원으로 올랐다고 했다. 이씨는 "사는 게 참 힘이 든다"며 "이번에만 예전 가격으로 해달라"고 부탁해, 결국 그렇게 또 치아 땜질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암 환자가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까지 미루는 경우도 적잖다. 정밀검사를 위한 CT(단층촬영) MRI(자기공명장치) 초음파 검사 등도 가능하면 미룬다.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시나 결과가 안 좋게 나올까봐 더 꺼리는 것이다.
성형외과 환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성형으로 인해 부작용이 나거나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도 무료가 아니면 불편해도 개인적인 형편이 풀릴 때까지는 얼굴이나 몸에 칼을 대지 않는다.
◆시대적 코드 '불황'
경제불황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불황에 서민들의 엥겔계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상식. 자녀교육비나 문화생활비는 줄여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 GS마트의 지난해 하반기 식품 매출은 1.4% 증가했으며, 올 상반기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식품 매출이 3.3%나 올랐다.
임병옥 GS리테일 마케팅팀장은 "먹는 것 외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업급여 신청자는 '부기지수'. 청년 실업자들의 애환도 극에 달하고 있다. 만 30세가 넘도록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가지지 못한 한 청년실업자는 우체국에서 한 뭉치의 편지에 우표를 붙이더니 하나만 남겨놓고 죄다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그는 남은 한 장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 후 거기다가 키스를 하고 나서 마찬가지로 우체통에 넣었다. 우체국 직원이 물었다.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인가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입사지원서입니다."
불황 한파는 신문·방송에도 불어닥쳤다. 예능 프로그램은 게스트 수를 줄이고, 연예인들의 입담을 위주로 하는 토크쇼 프로그램이 권장되고 있다. 방송국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몸값이 비싼 유명MC를 대신해 자사 아나운서를 대타로 내세우고 있다. 신문사 역시 자사 부담 해외출장이 급격히 줄었으며, 국내 출장도 최소 비용으로 줄이고 있다.
극심한 경기침체 여파로 보험을 해약하는 사람도 증가 추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4~8월 보험 해약건수는 285만7천건으로 2년 전 같은기간보다 11.5% 늘었다. 보험 가입자가 받은 해약 환급금은 9조9천214억원에서 10조1천824억원으로 2.6% 증가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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