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토크]견권유린

퇴근 후 어둠이 깔린 수성못을 산책하는 것이 요즈음 나의 정신적 이완이요, 육체적 단련이다. 2, 3바퀴 돌고 나면 가볍게 땀이 나기도 하면서 하루의 긴장과 수고가 말끔히 사라진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표정과 사연을 안은 채 있다. 심야로 접어들면서 주변의 네온사인이 교태를 부리며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움직이고 어두운 산그림자가 우두커니 몸을 감쌀 즈음에는 못 한가운데서 거대한 분수쇼가 펼쳐진다. 지인들에게 라스베이거스의 쥬빌리쇼나 파리의 물랑루즈쇼보다 더 시원하고 역동적이라고 자랑한다.

매일 밤 이런 향연을 만끽할 수 있음이 고귀하고 절실하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의 모습에서 가정을 시작하는 초보 부부의 풋풋함과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인생 역정에 대해 격려와 박수를 보내 보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정스런 포옹에는 지나간 시절, 나의 젊음과 열정을 떠올리며 미화된 추억을 되새겨본다. 저녁 식사모임을 마치고 산책하는 친구들의 교제는 보행속도부터 여유롭고 유쾌하다. 아름답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러 군상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비롭고 다채롭다.

불어오는 삽상한 물바람에 몸을 맡기며, 주변 카페에서 들려오는 발라드 음악을 낮게 따라 부르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르며 내려 보니 목줄이 없는 개 한 마리가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 뒤에서 20대 남녀 한 쌍이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뛰어 온다. 마치 귀여운 아기의 첫 걸음마나 재롱을 보고 대견해 하듯 말이다. 번쩍이는 섬광처럼 짧은 순간 이었지만 놀람에 상승된 나의 분노 게이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목줄 없이 개를 풀어 놓으면 안되잖아요! 그러고 보니 배변 봉투도 없네요! 용변 보면 어떻게 하실건 데요? 신고하면 과태료 무는 거 모르세요?" 동영상 2배속 필름 돌아가듯 속사포처럼 쏘아대자 젊은 커플은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얼버무린다. 그들도 상쾌하게 산책 나왔다가 드센 아줌마 때문에 일진을 망친 셈이다.

"토비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단짝이고 분신이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지난 11년간의 아름다운 시절은 나의 인생에서 황금기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매일 매일 토비를 그리워합니다." '뉴욕도그매거진'이란 애완견 전문잡지에 실린 '애완견 부고'란 내용이다. 절친한 친구의 부고만큼이나 애절하다. 뉴욕시민의 25%가 애완견을 키우고 있으며 그들의 독특한 생활양식이나 가치관은 이미 현대사회 문화의 한 형태로 자리매김할 만큼 비중이 크다.

개란 동물들은 흙을 밟고 살아야 하며 그들의 동료인 개들과 살게해야 하고 생리적인 욕구가 있을 때 짖어야 하고 똥을 싸야 하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좋은 것이 개에게도 유익할 것인가? 10만원이 넘는 버버리 개목도리, 몇 만원하는 발톱손질, 애완견 전용 리무진, 그리고 호텔에 과연 개들이 즐거워 할까? 애정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잔인한 견권유린이 아닐까?

이런 단순한 걱정은 이제는 논란의 대상꺼리도 아니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현상이 된 것 같다. 25%나 되는 애완가족 인구 속에서 개와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새로운 문화로 적응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개를 키워본 경험도 없고, 개털에 알레르기까지 있는 내가 오늘처럼 내 다리를 핥는 어색한 감촉을 만났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고, 굵은 목줄에 옭매여져 씩씩거리는 대형견을 좁은 골목길에서 만났을 때 섬뜩해하지 않고 반가울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하다.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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