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존엄사로 관심을 모았던 김모(77) 할머니가 인공호흡기를 떼고도 자발적인 호흡을 이어가자 존엄사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다. 대법원의 오판 시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과잉진료 논란에다 과잉진료 피해 위자료 청구 소송까지 각종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특히 인공호흡기 제거 후 수 시간 내 숨질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자 대법원, 세브란스병원, 환자 가족 등이 '존엄사'를 두고 책임 공방까지 벌이고 있다.
◆다시 이는 존엄사 논란
이번 '인공호흡기 제거' 행위에 대한 대법원, 병원, 환자 가족 등의 해석이 분분하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대법원은 '자발 호흡에 의한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의학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을 수렴, 불필요한 연명 장치를 제거하라는 의미에서 '인공호흡기 제거' 판결을 내린 것이지 '사망에 이르게 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세브란스 병원은 김 할머니가 2단계(인공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식물인간 상태)이기 때문에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대법원이 1단계(사망 임박 단계)로 판단하고 판결을 내렸고, 환자 가족들은 자발적 호흡이 가능한데도 병원이 1년 4개월 동안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는 등 과잉진료를 했다고 주장하며 기존 소송에 추가로 위자료를 청구한 상태다.
이번 논란은 임종 단계에 접어든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을 언론 등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해온 '존엄사'로 표현·규정하면서 존엄사 집행으로 오해하는 등 혼란이 가중됐다는 지적도 있다.
◆의료·법조·종교계의 입장은?
존엄사에 대한 의료·법조·종교계 간의 이견은 물론 각 분야의 개별 구성원마다 의견도 분분하다.
계명대 동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전재규 명예교수(전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장)는 "존엄사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들어온 말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용어다. 생명이 다한 사람을 계속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존엄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 있다"며 "이번 김 할머니 사례를 계기로 사회적인 논의를 거쳐 합일점을 찾고 남·악용 대책을 만들어 한국도 합법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임규옥 의료전문 변호사는 "생명권은 기본권의 기본권이라 해서 헌법에서조차도 규정하지 않고 있다. 최상위 기본권을 하위 법령으로 뒤집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법제화, 제도화도 안 돼 있는데 판례로 존엄사를 시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번 사례의 경우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너무 앞서 갔다. 설사 존엄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먼저 요건 등을 입법한 뒤 법에 따라 엄격하게 요건 충족 여부 및 절차를 거쳤는지 등을 철저히 확인하고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대구가톨릭대 김정우 인성교양부장 신부는 "가톨릭은 엄격한 의미의 존엄사를 인정한다. 존엄사는 연명 치료를 하지 않고 자연적인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이다. 교황청 신앙 교리성과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도 존엄사를 의미하는 연명 치료 중단(더 이상 가망이 없을 경우 불필요한 치료를 하지 않고 기본적인 간호만 하는 상태로 자연적으로 생명을 다하게 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극적 안락사를 존엄사로 몰아가는 것은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존엄사는 안락사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는 안락사로 인식되는 존엄사에 대한 법률 제정에는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지역 병원 현실
현재 지역 종합병원에 식물인간 상태로 입원해 있는 환자가 거의 없어 이번 김 할머니 사례 여파에 따른 존엄사 관련 문의나 요구가 없는 상태다. 그렇다 보니 병원들도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없고 자체 기준 마련을 위한 논의 및 준비도 진행하지 않고 있다. 현재 대한의사·병원협회 등이 준비하고 있는 존엄사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면 수용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데다 병원마다 내부 사정이 달라 참고하는 정도 선에서 그칠 가능성도 있다.
지역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지역에선 이런 사례가 거의 없다 보니 별도로 대응책을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면서 "심각한 상태에 있는 장기 환자가 있어야 기준 마련 등을 위한 논의가 불붙을 수 있는데 대상 환자가 없고 요구하는 가족도 없어 아무래도 존엄사와 관련해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 통합적 가이드라인 필요
국내에는 존엄사 허용 여부를 판단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기준이 없다. 이번에 김 할머니가 인공호흡기를 떼게 된 것은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 기능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 사례 이후 세브란스병원은 자체적으로 3단계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서울대병원은 말기 암환자의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를 받는 자체 기준을 만들었지만 사회 통합적인 판단기준은 없는 상태다.
이에 우리나라도 의학·법조·종교 등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명한 존엄사 판단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의학, 법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 종교계, 환자, 보호자들의 의견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침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의학회 등 3개 의료단체가 먼저 나서 '연명치료 중지 관련 지침 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초까지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국내 병원 모두 통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침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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