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이야기] 26. 대구역 주변

사람도, 질병도 대구역을 통해 스며들었다

대구역 맞은편에 택시 승강장과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해방이 된 뒤에도 택시회사와 시내버스, 그리고 시외버스 정류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칠성동 지하도 서쪽에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꽃시장이 있는데, 1천652㎡(500평) 규모의 시장에 생화와 조화, 화분과 소품을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으며, 싱싱한 꽃을 싼값에 공급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꽃시장의 동쪽 길 건너편에 저수지 공원이었던 도수원(刀水園)이 있었다. 시청 뒤쪽으로 흐르던 하천의 물을 가두어 조성한 곳으로 1920년경 일본인이 매입해 낮에는 유료 공원으로, 밤에는 별장형 요정으로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영귀정(詠歸亭)으로 불리며 선비들이 즐겨 놀았고, 그 앞으로 향교에서 설립한 협성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미뤄 보아 향교의 부속 시설이었던 것 같다.

대구역 동쪽에는 새벽에만 번개같이 열리는'번개시장'이 자리했다. 왜관'신동'경산'하양'영천 등지에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경부선과 대구선 완행열차를 이용해 대구역에 내려서 새벽장을 보았다. 이른 아침에 물건을 내다 팔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려는 시골 사람들의 인심이 넉넉했다.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해장국 솥 주변에 둘러서서 인정이 오가던 정겨운 시장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상설시장화해 아쉬운 마음 그지없다.

지난날의 얼룩진 흔적도 없지 않다. 1946년 10월 1일 새벽에 대구역 광장에서 시작된 이른바'10'1 사건'은 3개월간 계속되었다. 해방 후 좌우의 첨예한 대립으로 빚어진 사건으로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이념투쟁이 격렬했다. 남로당 외곽단체인 대구노평(大邱勞評)의 조종에 의해 대구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파출소를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사건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을 뿐 아니라 엄청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나왔다.

1946년 6월 청도에서 발생한 콜레라(호열자)가 대구역을 통해 전염되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사망자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감염 환자가 700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391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불명예스럽게도 전국 최고였다. 당시 대구 최고의 갑부였던 진골목의 서병국도 이 때 사망하였다. 그뿐이랴.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민회관 남쪽 거리와 태평아파트 일대에는 사창가가 형성돼 있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동대구역이 생기면서 대구역이 그 빛을 잃어버렸고, 곳곳에 재개발이 이뤄졌으며, 새로운 건물과 넓은 도로가 주변 환경을 바꾸어 놓았다. 그와 함께 철도로 해서 빚어진 남북간 개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교동 네거리와 칠성시장 사이에 지하도가 뚫렸다. 또한 1971년 대구역 지하도가 개통되면서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십자로 구실을 하고 있다. 태평로, 그 이름대로 아름다운 고장,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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