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 배를 맞닿을듯 서있는 마을, 대구 달성 가창면 옥분리에 화가 권기철씨의 작업실이 있다.
서로 닿지 못하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그리움처럼, 그의 마음은 언제나 미술과 음악, 문학의 언저리를 맴돈다.
축사를 개조한 그의 작업실은 밖에서 보기엔 그저 그런 조립식 건물이다. 하지만 문을 열면 그곳은 예술이 탄생하는 가장 비밀스런 장소가 된다. 바닥에는 세상을 향해 꿈틀대는 대형작품 한 점이 마지막 붓질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몇 곡의 음악과 몇 권의 책이 더 필요할 터.
그는 1천652㎡(50여평)의 작업실이 마음에 꼭 든다. "이런 공간을 찾아 3년을 헤맸어요. 2년 전에 지인이 우연히 소개해줘 여기에 들어왔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찾던 공간이죠. 공간에도 인연이 있나 봐요."
그는 작업할 때 음악을 굉장히 크게 틀어둔다. 팝과 클래식이 반반. 표현적인 작품을 할 때는 강한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를 특히나 좋아한다.
'느낌'이 오면 3, 4일 내리 작업실에서 작품에만 몰두한다. 느낌을 곧바로 증폭시켜 화폭에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열 개 작품 중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이 두세 작품쯤 나온다. 그럴 땐 기분이 아주 좋다. 고통스러운 화가의 삶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순간들 때문이다.
그의 작품 활동이 이처럼 음악과 맞닿아있기 때문에 이 작업실은 그에게 더없이 유용하다. 마을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어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도 탓하는 사람이 없다.
주위를 둘러싼 자연은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 그는 '어이쿠 봄 간다'는 제목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는 '관계'와 '소리'에 대한 작품을 주로 해왔지만 작업실을 옮기면서 주제는 자연으로 확대됐다. 자연은 '시간' 개념을 선사했고, 그는 봄이 가고 인생이 흘러가는 것을 화폭에 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자신만을 위한 아지트가 있다. 바닥은 나무를 짜서 깔고 머리 위엔 흰 천을 늘어뜨려 제법 아늑하다. 키 낮은 책꽂이에는 그가 즐겨 보는 책들이 꽂혀 있다. 이윤기 기형도 장정일 장영희…. 그의 벗들이다.
"목침을 베고 누워 여기서 책을 보면 행복해요.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하죠. 세상 부러울 것 없어요."
화가는 '돈 안 되는' 직업이라지만 그에겐 축복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해 자연스럽게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도 그림 그리는 게 참 좋다.
그의 관심은 회화작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래픽을 좋아해 책 편집하는 것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서예를 해 캘리그래피 작품도 많이 한다. 그가 제목을 쓴 책만 해도 20여권. 대구시립교향악단 공연 포스터, 대구컬러풀축제, 대구문화예술회관 등 굵직굵직한 행사 포스터 글씨는 그의 것이다.
"지극히 인생은 50대 50이에요. 넉넉하지 못해도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이유다.
그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동안 인도 여행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대책없이 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는 20만원으로 인도 전역을 두 달간 여행하기도 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인연은 그에게 많은 영감과 그림'사진'글을 선물했다. 인도 여행의 이런 부산물들을 모아 비주얼북을 만들고 있다. 그 책은 하반기에 출간 예정이다.
세종문화회관갤러리 10주년 기획전, 10월 개인전 등을 앞두고 그가 이 작업실에서 보내게 될 시간은 더 많아질 것 같다.
"화가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붓을 들고 죽는 것일 테죠?"
가창의 드센 바람은 사물과 부딪히며 소리를 남긴다. 세상과 부대끼며 그 파열음을 작품으로 기록하는 화가의 손은 쉼이 없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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