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의 가격은 오크통 속에서 숙성되는 기간에 비례한다. 발효 과정을 거친 위스키 원액은 오크통에 저장된 다음 다양한 유기반응을 거치는데, 이 반응은 위스키의 성분과 오크로부터 추출되는 성분 사이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화학적 결합 및 분해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이 유기반응은 적당한 숙성 조건이 제공되면 인간에게 만족감을 주는 맛과 향기를 가진 성분들을 생산하게 되며, 따라서 위스키는 오크통 속에 장기간 저장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진다.
위스키가 오크통에서 숙성된다면, 학생은 대학에서 교육되고 성장한다. 대학은 학생이라는 원액을 숙성시켜 최상의 가치를 가진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생과 대학 간에 활발한 유기반응이 진행돼야 한다. 학생의 진가는 졸업 후 비로소 발휘되는데, 그때까지 학생은 대학이라는 오크통 속에 충분한 시간 동안 머물러 있어야 한다.
산학협력의 목적은 기업과 대학이 상호 협력해 서로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대학이 해야 할 역할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업에 우수한 인력을 공급하는 일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기업 인력인 학생이 대학이라는 저장소에 장기간 보관돼 사회에서 필요한 맛과 향을 한껏 보유하게 해야 한다. 또한 대학은 학생이 올바른 화학적 작용을 거칠 수 있는 적절한 환경과 조건을 유지해 주어야 한다.
현재 정부가 주도하고 대학이 참여하는 산학협력 사업의 현실적 모습은 과연 바람직한가. 산학협력을 위한 무분별한 정부의 자금 지원은 대학을 제 궤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대학이 본연의 역할을 망각하게 할 수 있다. 기업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투하되는 각종 자금은 대학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인적'물적 자원을 외부로 유인해 대학의 체질을 저하시킬 위험이 있다. 때로는 산학협력이라는 애초의 목적과는 상반된 산학 충돌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산학협력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바람직한 사회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실용과 학문이 서로의 영역을 공유하고 협력한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그러나 산학협력의 모델 설정이 맹목적인 대중적 요구에 휩싸이게 되면, 순수해야 할 학문 고유의 영역이 훼손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체의 공격적 생리는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학문적 탐구 논리와 항상 부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도한 실용주의를 전제로 한 학술적 연구는 자칫 왜곡되기 쉽고 학문의 윤리성을 손상시킬 수 있다.
진정한 산학협력은 대학이 그 본질적 기능인 교육을 제대로 수행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하고, 그를 위해서는 대학의 구성원이 제 위치를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산학협력을 수행하면서 교수나 학생이 학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학의 강의실과 산업현장은 기능상 분명히 차별화되는 곳이다. 학생은 강의실에서 충분한 시간 동안 교육된 다음 사회로 배출되어야 마땅하고, 교수는 그를 위해 학생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또한 기업은 학생이 완전히 숙성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수확하는 인내를 보여야 한다.
고품격의 위스키를 생산하는 우수한 오크통을 만들기 위해 정부는 대학의 지원금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예산을 투입하는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학은 매력적인 기관임에 틀림없다. 또한 대학을 지원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기대치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현재 대학은 중앙부처뿐만 아니라 지자체와 그 유관기관으로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지원금의 수혜자가 되고 있다. 한편 대학에 유입되는 정책예산은 그 자금원이 과다하게 분산돼 있으며, 각 부처의 사업목적에 따라 자금의 성격과 집행기준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자금을 집행하기 위해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학 내부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상존하게 된다.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정부 각 기관으로부터 대학으로 지원되는 자금은 우선 단일 부처에 모여 종합적 기획을 거친 다음 집행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대학은 만능이 아니다. 대학은 국가의 우수한 인력이 집결돼 있고 수많은 청소년들과 학부모가 동경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 역량이 자칫 과대평가되기 쉽다. 대학은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며 산학협력은 그 교육과정에서 요구될 수 있는 일부 파생적 기능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정부는 대학 관련 예산을 편성하기 전에 대학이 그 고유의 기능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지원금을 소화할 수 있는지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여상도 경북대 테크노파크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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