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살이'는 한숨 날 때가 많다. 그 중 하나, 도회 생활에서는 쉽사리 계절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도 안타까움이라면 안타까움이다. 도회지 가로수는 왜 계절을 정확히 알려주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다. 플라타너스 잎은 시퍼런 채로 떨어져 뒹굴고, 심지어 은행잎마저도 푸른 채로 쏟아져 지저분하게 말라간다. 그런 판에 사철 푸른 히말라야시더야 더 말할 게 뭐 있겠나.
산은 봄과 가을, 두 계절 잊지 않고 꽃을 낸다. 봄에는 '생산의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조락의 꽃'을 피운다. 이 계절의 운행을 따라 꽃을 내는 산을 보고 사람들은 산에 대한 경외감을 더한다. 아마 지금쯤 산은 가을꽃을 낼 터이다. 조금 성급하지만 가을꽃, 단풍이 아름답다는 청송 주왕산으로 단풍 마중을 나선다.
바탕색은 노랑이다. 청송 가는 길, 북영천IC 부근 들판의 논들은 노랗고, 지나치는 숲들도 누릇누릇하다. 삼자현(三者峴) 산비탈 갈대는 누르께하고 고갯길 활엽수는 갈색이다. 현동면을 지나며 이따금 마주치는 은행나무들도 이미 연노랑이고 밭둑길 옆 들국화는 진노랑이다.
청송 길 마지막 관문, 상평재를 넘어서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주조색은 푸른색이다. '청송(靑松), 푸른 솔이 많아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청솔이 많아 청송이지만 거쳐 온 길에 비해 결코 가을색이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푸른색 바탕에 드문드문 섞인 노랑은 한결 가을 맛깔이 난다.
본격 단풍 마중을 나서는 대전사 앞 상의주차장. 가을은 이미 그곳에 물들어 있다. 줄지어 늘어선 관광버스, 울긋불긋 꽃단장한 산행객들로 온통 가을색이 뿌려졌다. 자글자글 쏟아지는 햇살 같은 여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지도를 들고 단풍 탐방길을 설계한다.
대전사를 출발 자하교, 학소대 쉼터를 거쳐 제 1, 2, 3폭포를 보고 내원동까지 올라가 그곳을 반환점으로 돌아 내려와 다시 후리메기로 빠져 칼등고개를 지나 주왕산 정상을 밟은 후 대전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잡는다.
대전사 절집 마당. 이미 은행잎은 가을이 완연하고, 뒤로 둘러친 무장굴 바위 아래쪽으로도 '색의 잔치'는 시작되었다. 자하교쉼터로 방향을 잡고 휘적휘적 걷는 신작로. 길의 양옆 생강나무 잎은 엷은 한지처럼 노랗게 익었다. 신비스럽도록 노란색 생강나무 잎을 두고 학자들은 말한다. 새봄 싹이 틀 때부터 몸속에 예비되어 있던 노란색이 엽록소에 가려 있다가 이제야 가을임을 알고 '안토시안'을 생성시켜 제 몸을 불태우고 있다고.
단풍은 어차피 단풍나무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학자들은 또 태생부터 붉은 단풍나무 잎을 두고, 홍색소와 공존하고 있는 엽록소나 노란색, 갈색의 색소성분이 양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꽃의 풍경으로 단풍을 찾아 나선 이들은 그것들이 어떤 화학반응으로 제각각의 색을 만들든 간에 관심 두지 않는다.
학소대쉼터까지 오르는 개울가에 늘어선 단풍나무들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 단풍잎이야 싹 틀 때부터 붉은 것이지만, 봄과 가을의 단풍색은 판이하다. 봄의 단풍나무 잎이 탁한 검붉은 색이라면, 가을의 단풍나무 잎은 잘 마른 고추껍질처럼 투명한 붉은색이다. 가을 단풍나무 잎들은 쏟아지는 햇살을 여과하지 않고 투과함으로써 '단풍'의 대명사로서 임무를 완결시킨다. 산길을 걷는 동안 소슬바람이 개울을 따라 치불자 붉은 잎들은 일제히 시린 손을 오그리며 하늘을 향해 흔들어댄다. 그 전율 같은 흔들림으로 왜 단풍이 아름다운지 비로소 알 만했다.
가을산에서 붉기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것이 아마 옻나무나 붉나무일 것이다. 옻나무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고 기슭의 것들은 거의가 붉나무들이다. 비교적 넓은 붉나무 벌건 잎은 섬뜩하도록 사람들 눈길을 끈다. 대부분 키 낮은 유목(幼木)들이 길섶을 장식하고 있어 넉넉잖은 붉은 색을 어지간히 보완해준다.
이들 단풍, 적(赤)과 황(黃)의 조화는 자하교에 서서 보는 광경이 소나무 푸른빛이 점점이 박힌 하얀 병풍바위와 어우러져 일품이다.
쉬엄쉬엄 산길을 걷는 동안 이미 잎새를 모두 떨어뜨려 버린 나목들을 간간이 만난다. 성질 급하게 일찌감치 벗어던져 버리고 선 것들은 물푸레나무이거나 산벚나무 따위이다. 이들이 왜 숲과 '총화'(總和)하지 못하고 서둘러 나신(裸身)이 되어버렸는지 지나치는 사람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와 같은 개별성들이 인정되는 곳이 숲이고 그 개별성으로 인하여 숲이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만하다.
키 큰 까치박달나무나 쪽동백은 가을산에서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다. 까치박달나무는 누리끼리한 잎을 일찌감치 떨어뜨리고 마치 곤충집과 같은 씨방을 달고 있어 스산해 보인다. 쪽동백나무 역시 푸르죽죽한 넓은 잎은 끝에서부터 또르르 말려 단풍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볼품없다.
끝이 말려 떨어진 쪽동백 잎들을 밟으며 제1, 제2, 제3폭포를 거치는 동안 넉넉지는 않으나마 옥류수가 흘러내려 길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씻어준다. 하얀 자갈과 거친 모래를 물고 있는 개울에는 색색의 낙엽들이 떠다니고 작은 소(沼)의 명경수에는 가을산과 푸른 하늘이 일렁이고 있다.
제3폭포를 지나 몇 년 전만 해도 3가구가 전기 없이 살았다는 내원마을까지 가는 길에는 서어나무와 팽나무가 섞여 노란 숲을 이룬다. 특히 이 길 옆에는 산 아래쪽에서 잘 보이지 않던 칡넝쿨이 우거져 연두색으로 뒤덮여 있다. 잠시 팽나무 숲에 앉아 쉬는 동안 지난날 여기서 '산골 삶'을 일구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들 어디에서 지낼까 궁금해진다. 그들은 어디 대처에서 터를 잡고 살더라도 이 즈음이면 만산홍엽, 주왕산의 가을을 그리워 할 터이리라….
내원마을을 반환점 삼아 돌아내려와 후리메기 삼거리에서 칼등고개를 탄다. 이 길은 생태계 복원을 위해 11월 말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폐쇄하고 토, 일요일에만 개방한다. 칼등고개를 올라 주왕산까지 오르는 코스는 비교적 가파르다. 이 산길은 해발 500m를 넘어서면서 활엽수는 드물고 키 큰 적송들이 숲을 이룬다. 적송의 숲에도 가을은 어김없다. 침엽 소나무도 물을 아래로 내리고 활동을 정지할 준비를 마쳤고, 숲 속 이끼들도 생장점을 꺾었다. 그러나 주왕산을 넘는 동안 숲은 여전히 향기롭고 서늘하다.
정상을 타고 넘어 하산길을 잡고 10분 정도 내려서면 산은 또다시 활엽 단풍산으로 바뀐다. 우선 키 낮은 싸리나무들이 소나무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노랗게 물들어 있고 떡갈나무들이 누르고 붉은 몸치장을 시작한다. 떡갈나무가 숲을 이루는 지점까지 내려서,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건너다보이는 장군바위 주변이 가을색으로 불타기 시작한다. 대전사 뒷길을 내려서는 동안 굴참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이미 가을 준비를 마치고 석양빛에 물들어 있다.
다시 대전사 앞마당. 벌써 햇살은 처마 끝과 석탑 꼭지에서 스러지고, 산들은 더욱 색이 깊어진 듯하다. 은빛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주왕산의 바위들이 금빛 석양에 침묵하는 주왕산의 숲보다 결코 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주왕산의 단풍은 단풍이 아니다. 사람들은 더러는 올해 가뭄이 심해 가을이 늦다고도 하고, 더러는 지구온난화 때문에 가을이 늦어진다고도 하고, 더러는 본디 올해는 절후가 늦다고도 한다. 꼭 들어맞는 답이 무엇인지 알 바 없으나, 주왕산의 가을 진면목을 보자면 10월 말 11월 초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저 나름의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장엄한 숲의 군무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만해도 가을 산의 꽃이 봄 산의 꽃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알 만했다. 주왕산 단풍 마중을 하고 나니 가슴에는 벌써 낙엽이 버석거린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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