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악마의 동심

뉴욕의 공원에서 부랑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I Am Blind'(나는 앞을 못 봐요)라고 적힌 팻말을 건 채였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적선하지 않았다. 그때 한 남자가 부랑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팻말의 글씨를 바꿔 쓰고는 자리를 떴다. 놀랍게도 이후 사람들의 적선이 이어졌다. 그 남자가 마법을 부린 것일까? 비결은 이랬다. 남자는 팻말의 글씨를 다음처럼 고쳐 놓았을 뿐이었다.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곧 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나는 봄을 볼 수 없다오) 그 남자는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불톤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3초 만에 행복해지는 명언 테라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히 나왔으랴. 단 한마디로 상대방을 웃고 울게 만드는 것이 언어의 힘이다.

그림책을 기획하다 보면 원고를 채우는 낱말을 유아 눈높이에 맞춰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사전에 나오는 뜻풀이가 원래 단어보다 오히려 어렵거나 무미건조해서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가치 사전'(채인선 지음)은 필자에게 단비처럼 다가온 책이다. 아이들이 알아야 할 24개의 가치를 정해 사전 형식으로 수록했는데 몇 구절을 옮겨본다. '믿음이란, 강아지가 나를 보며 맛있는 밥을 곧 주겠지, 하고 꼬리를 흔드는 것' '양심이란, 동생한테 자꾸 심부름 시키지 않는 마음' '공평이란, 교실에서 눈이 나쁜 아이가 앞에 앉고 눈이 좋은 아이가 뒤에 앉는 것'.

'아름다운 가치 사전'과 반대의 길을 걷는 책도 있다. 1911년 발간된 '악마의 사전'(앰브로스 비어스 지음)이 그것인데, 이 책은 어떤 단어에 대해 사람들이 막연히 믿는 가치의 어두운 속살에 메스를 들이민다. '악마의 사전'이 정의한 '행복'이란 '다른 사람의 불행을 곱씹어 볼 때 드는 유쾌한 감정'이고, '증오'란 '타인이 나보다 잘난 경우에 생기는 감정'이며 '충고'란 '친구를 잃는 수많은 방법 중에 특히 바보가 선호하는 방법'이다. '악마의 사전'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동심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삶이 그만큼 각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도종환 시인이 노래했듯이 우리 모두에겐 '내 안의 시인'이 있다. '잃어버린 내 안의 시인'은 다름 아닌 동심이다. 필자는 동심에 사람을 치료하는 원천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상담을 하거나 문학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그림책과 동화책을 자주 활용하는데 오히려 어른들이 더 많이 공감한다. 아이의 마음이 담긴 책들이 세상사에 찌든 어른들에게 치유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유아 또는 아동만 보는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고 정채봉 작가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용어를 만든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들 중에는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즐비하다. 자녀 교육을 위해 그림책과 동화책을 읽다가 마음의 안식처로 어린이책에 빠져든 어른들도 많다.

대구에 출판산업단지가 생긴다고 한다. 대구시 계획에 따르면 달서구 월성동 비상 활주로를 중심으로 한 24만5천㎡ 부지에 출판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200여 개의 인쇄 출판 관련 업체가 입주하며 출판산업지원센터가 들어선다.

필자는 대구시의 정책이 반가우면서도 내친김에 욕심을 더 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대구출판산업단지가 동화 관련 콘텐츠 창작'개발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동화 관련 콘텐츠는 돈이 되는 사업이다. 출판업계가 불황에 시달리고 있지만 어린이책 시장만은 상황이 다르다. 국내 출판 시장의 메카로 자리 잡은 경기도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가 매년 대규모의 어린이 책 잔치를 여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을 비롯한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선진국들은 동화를 주제로 한 문화 콘텐츠로 수많은 해외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대구는 국내에서 서울 다음으로 어린이책 시장 규모가 큰 지역이다. 그래서 필자는 대구출판산업단지 안에 동화 테마파크가 만들어지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국내 유일의 동화 테마파크가 대구에 조성된다면 분명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또한 '내 안의 시인'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곳이 될 수도 있다. 혹시 아는가. 우연히 놀러온 악마가 이곳에서 동심을 찾게 될는지.

김은아 마음문학치료연구소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