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여름 폭풍우를 만나 지중해의 어느 낯선 섬에 갇혔다. 그 때 나는 그리스의 유명한 산토리니섬에서 터키의 항구도시 쿠사다시까지 배를 갈아타며 장장 1박2일을 항해하는 멋진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우선 산토리니섬에서 하루 서너 편 운항되는 배를 타고 3시간 30분을 항해하며 파로스섬에 가야 한다. 거기서 오후 2시쯤 배를 갈아타고 지중해의 보이지 않는 국경을 넘어 6시간 거리의 터키 사모스섬으로 간다. 사모스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다음 날 아침 다시 배를 타고(이 배는 아침, 저녁 하루 두 차례 운행된다) 목적지인 쿠사다시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 낭만적인 선박여행의 난코스는 국경을 넘는 파로스에서 사모스까지이다. 배가 일주일에 딱 한 번, 토요일 오후 2시 10분에만 출발하므로 놓치지 않고 잡아야 한다. 나는 1박2일의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빡빡한 스케줄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정확히 토요일 아침, 산토리니에서 파로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파란지붕을 얹은 하얀 집들이 지중해의 햇살을 입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섬! 그리스를 대표하는 지중해의 낭만, 산토리니섬은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멀어졌다. 나는 아름다운 그리스에 작별을 고했다. '오늘밤은 드디어 유럽의 종착지이자 아시아의 출발지인 터키에서 보낸다! 5개월여의 유럽여행을 끝내고 아랍세계로 들어서는 문턱에 와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1년여의 세계 일주를 꿈꾸었던 당시 나의 다음 계획은 터키, 요르단, 시리아 등 중동지방을 거쳐 아프리카의 문턱인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동아프리카 종단, 그리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남아메리카로 날아간다! 산토리니섬을 떠난 배는 마치 그대로 곧장 터키와 이집트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그리고 다시 아메리카까지 신밧드의 대모험을 신나게 펼쳐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배가 점점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선실 매점의 남자가 태풍을 만난 거라고 했다. 나는 3시간 동안 의자와 기둥을 붙들고 눈을 꼭 감고 멀미를 견뎠다. 여기서 아프리카라니! 그냥 바다 한가운데라도 좋으니 이 배가 어디든 나를 내려놓아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결국 나는 단지 배를 갈아타는 정거장쯤으로 여겼던, 나의 멋진 여행계획에는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이름도 낯선 그리스의 수많은 점들 중의 하나인 '파로스섬'에 내던져졌다. 일주일에 한 번 터키의 사모스섬으로 가는 배는 취소되었고 나는 코앞에서 국경을 넘지 못했다.
"환불? 그런 건 이런 작은 섬에서 못해. 아테네로 가야지."
아니 이건 무슨 황당한 말인가. 나는 태풍으로 배가 취소되었으니 정당한 환불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계획에도 없었던 이 작은 섬에서 다시 일주일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터키로 가는 바닷길을 포기하고 태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터키로 가는 기찻길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일단 이 섬을 벗어나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그리스 북부의 국제선 열차가 다니는 테살로니키로, 거기서 다시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로 가는 것이다. 새로운 여정에서 어차피 아테네를 들러야하기는 했지만 그냥 들르는 것과 표값을 환불받기 위해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모르는 선박회사를 찾아다니며 하루를 헤매야 하는 것은 다르다. 하늘과 땅 차이다! 그 때부터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고약한 날씨와, 예정에도 없이 갇히게 된 그리스의 이 낯선 섬과, 배삯 환불도 안 되는 그리스의 낙후된 시스템과, 그런 모든 걸 당연히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저 고약한 그리스 남자! 닿을 수 없는 곳은 더 안타까운 법이다. 나는 벌써 닿을 수 없는 터키에 대해 운명적인 안타까움과, 그렇게 만든 그리스에 대해 운명적인 분노를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운 좋게도 다음 날 날씨는 갰고 아침 일찍 아테네로 가는 배가 출발했다. 7시간이 넘는 대항해를 마치고 오후 늦게 아테네에 도착하자마자 표를 환불해줄 선박회사를 찾아 나섰다. 물어물어 두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선박회사의 환불을 담당하는 사무실 유리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희망은 거기서 완벽히 침몰했다. "일요일이라서 아무도 없어. 내일 다시 와."
나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차갑게 말하는 그리스 여자에게 소리쳤다. "오로지 이 표 한 장 환불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아테네까지 왔단 말이에요! 내일 아침 당장 터키로 가야하는데 다시 여기까지 어떻게 와요?!" 억울하고 서럽고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왈칵 쏟았다. 여자는 표를 달라고 했다. 나는 반짝하는 희망을 놓칠세라 얼른 표를 내밀었다. 꼬깃꼬깃한 표를 흘낏 들여다본 여자는 자신의 지갑을 열고 정확히 19유로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울지 마. 이것 갖고 여행 잘 해."
나는 황망하게 웃으며 19유로를 손에 꼭 쥐고 돌아 나왔다. 19유로라니…. 우리 돈으로 3만원도 안 되는 돈이다.(물론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3만원은 몹시 큰 돈이지만) 터덜터덜 아테네 거리를 걸으며 이틀 동안 나의 온몸으로 저주한 그리스란 나라를 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미움 받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지나간다. 여행을 왜 내 뜻대로 하려 했을까. 여행은 그저 그 곳의 뜻대로 쓸려가 보고, 당해도 보는 거다. 그리고 웃으면서 미운 정도 주는 거다.
미노
댓글 많은 뉴스
'험지 경북' 찾은 이재명 "제가 뭘 그리 잘못을…온갖 모함 당해"
[정진호의 每日來日] 한 민족주의와 두 국가주의, 트럼프 2기의 협상카드는?
홍준표 "탈당, 당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잠시 미국 다녀오겠다"
이재명 "공평한 선거운동 보장", 조희대 탄핵 검토는 "당 판단 존중"
김문수-지도부, 단일화 사분오열…국힘, 대선 포기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