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신성인'(殺身成仁).
한국이 현재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매일신문사가 주최하고 대구보훈청이 주관하는 '2010 매일보훈대상' 시상식이 17일 오후 대구문화예술회관 달구벌홀에서 열렸다.
상이군경, 유족, 미망인, 장한 아내, 특별 무공수훈 부문 등 5개 부문에 걸쳐 대구와 경북에서 각각 5명씩 10명이 선정됐다. 조국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선열들의 행적이 조금씩 잊혀 가고 있는 요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실천해 온 수상자들의 이야기는 전후세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상이군경 부문 이윤영(80·서구 중리동)
1950년 7월 육군에 입대해 6사단 19연대에서 복무하던 이씨는 같은 해 8월 경북 의성군 비안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좌전박 관통상을 입고 투병하다 이듬해 4월 명예전역했다. 이후 대구지방전매청에 입사해 3년치 월급을 모두 털어 불우한 동료를 돕는 등 자신보다는 항상 이웃을 먼저 생각해 왔다. 또 1952년 8월부터 1995년 4월까지 43년간 서구 중리동 자율방범대 회장직과 상록경로당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불량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성금을 기탁하는 등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매진했다. 특히 1997년 4월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대구 서구지회장에 선임돼 2002년 4월까지 재임하면서 회원복지 및 위상 정립에 앞장서왔다.
◆유족 부문 김부원(58·서구 평리3동)씨
1952년 생으로 집안의 장남이었던 김씨는 6·25때 아버지를 잃고 어린 나이에 장손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유공자 자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한평생 무료급식 봉사 및 홀몸노인 돌보기, 자연재해지역 복구 활동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하는 등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했다. 또 1998년부터는 유족회 대구 서구지회장으로 지내면서 회원들의 유대와 복리에 힘썼다.
◆미망인 부문 서해순(74·남구 대명 6동)씨
23세 때 당시 4세 위였던 이석병(순직 군경)씨와 결혼한 서씨는 단란했던 결혼 생활이 오래가지 못했다. 뱃속에 태기를 느낄 즈음 남편은 입대 영장을 받았고 강원도 홍천에서 근무하다 유격훈련 도중 사망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눈망울을 보며 남편을 잃은 슬픔을 꿋꿋이 이겨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갖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그리고 일손을 놓은 지금에도 주변 어르신들을 위해 각종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장한 아내 부문 도금자(62·북구 침산동)씨
도씨의 남편 박두병씨는 1953년 6월 19일 원주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우상박절단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아내 도씨의 극진한 내조가 있어 다시 우뚝 설 수 있었다. 1979년 상처한 박씨와 처녀의 몸으로 재혼한 도씨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남편과 전처자식 4명을 헌신적이고 각별한 사랑으로 길러 현재 4명 모두가 대기업 중역, 의학박사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별 무공수훈 부문 이장우(80·중구 동인동2가)씨
1930년생인 이씨는 대구 공립농림학교 재학 중 6·25가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해 육군 특수부대 유격요원으로 전후방 전선을 누비며 생사를 초월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1951년 4월에는 강릉 비행장 탈환작전에 참전해 대승을 올리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부대표창과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1955년 6월 전역한 뒤 농어촌지도자를 양성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농업을 다루는 공직에 있으면서 각종 국토개발 사업을 주도했고 1982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특히 2002년 무공수훈자회 중구지회장을 맡으면서 8년 동안 굳건한 애국심으로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 회원들의 복지에 앞장서 왔다.
◆상이군경 부문 최만동(63·김천시 구성면)씨
1964년 3월 군에 입대해 1984년 2월 육군 소령으로 전역한 최씨는 1999년 김천으로 귀농해 활력있는 농촌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고품질 과수생산 기술보급을 통한 수출판로 개척과 후계 농업경영인 육성, 국책사업인 농산물 전자상거래(e-Trust 인증) 확충, 친환경인증 자두생산 마을 조성 등 지역주민의 화합과 농업발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를 인정 받아 최씨는 2009년 구성농업협동조합장 표창장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마을 노인정을 이끌면서 지역 불우이웃과 김천보육원생들에게 수확한 과실을 매년 지원해 주는 등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유족 부문 이분선(79·성주군 대가면)씨
이씨는 1981년 2월 제대를 한 달 남겨 놓은 장남을 잃었다. 하지만 이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26년 동안 아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성주읍 삼산리 충혼탑을 찾아 참배와 주변 청소를 하면서 2000년 6월 성주군재향군인회 회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또한 이씨는 나눔 정신으로 지역사회 자원봉사의 길을 마련했다. 미역, 다시마, 젓갈 등을 팔아 불우 이웃과 홀몸노인,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등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마을 화단 가꾸기 및 국토 청결운동 참여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목욕 및 식사를 제공하고, 산불방지 활동을 하는 등 팔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지역사회 발전에 힘을 쏟았다.
◆미망인 부문 최정희(76·성주군 성주읍)씨
최씨의 남편은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6·25전쟁에 참전, 전사했다. 최씨는 전사통지를 받은 후 시댁으로 들어가 남의 집 일을 하며 품삯을 받고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홀시어머니를 34년간 모시는 등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 최씨의 효심이 마을에 알려지면서 1984년 대가농협장 효행상을 수상했다.
1970년부터 20여년 동안 마을부녀회장으로 활약한 최씨는 공로를 인정받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으로부터 공로패를 수여받았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전몰군경미망인회 성주군지회장을 맡으면서 충혼탑 참배 및 정화활동, 회원 복리증진에 앞장서 미망인회를 활성화하는 등 단체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장한 아내 부문 박옥순(57·영천시 야사동)씨
박씨는 남편이 군에 있는 동안 시조부와 시동생의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소작농 일을 하면서 가족을 책임졌다. 군 복무 중 척추 부상을 당한 남편이 일을 할 수 없자 여자의 몸으로 연탄 소매업을 하는 등 집안의 살림을 꾸리는 데 헌신했다. 힘든 살림에도 절약정신을 잃지 않고 조금씩 모은 돈으로 중고자동차 사업을 시작해 우수한 중견 사업체로 키워내는 등 가정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힘든 가운데서도 더 어려운 이웃에 나눔을 망설이지 않았다. '나사렛정신박약아수양원'에서 5년간 목욕봉사와 도우미 활동을 했으며 '북안마야정신병 요양원' 봉사회원으로 10년간 환자 보살피기 및 잡일 도우미로 활동 중이다.
◆특별 무공수훈 부문 박봉출(76·의성군 의성읍)씨
1951년 12월 17세의 나이로 학도병이 된 박씨는 6·25 전선에서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 1955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그는 의성군체육회 이사 및 실무부회장을 맡으면서 우수 선수 발굴 및 선수육성에 힘썼다. 또 무공수훈자 의성지회장을 맡으면서 3천500만원을 지원받아 '의성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건립했다. 6·25 참전 유공자회 의성지회장을 지내는 동안 의성 호국동산에 충훈비 5억원을 조달하는데 기여하는 등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힘을 쏟았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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