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휴가 후유증,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출근이 싫어… 사는 게 뭘까… 누구나 잠깐씩은 철학자가 된다

휴가 때 좋았던 경치와 해변의 비키니 여인(?)들이 그립다.
휴가 때 좋았던 경치와 해변의 비키니 여인(?)들이 그립다.

"손에 안 잡힌다, 안 잡혀!" "뭐가?" "일이요."

휴가가 좋긴 좋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매년 휴가를 떠나는 중년 남성은 심장병으로 사망할 위험이 3분의 1로 낮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장점만큼 휴가 후유증도 다각도로 나타나고 있다. 출근하기 싫고, 점심만 먹고 나면 졸리고, 책상에 앉아 있어도 멍하기 일쑤 아니면 육지에 올라온 문어나 낙지처럼 맥이 쭉 빠져 퇴근시간만 기다린다. 극단적인 경우엔 병가나 다른 형태의 휴가를 사용하기도 하고, 직장을 옮기기 위해 아니면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지는 케이스도 더러 있다. 심지어는 군대나 경찰 같은 조직에서도 휴가 후유증에 시달리는 장병이나 전·의경들을 위한 전문 상담이 늘어날 정도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개미처럼 일만 하다 휴가를 떠나 문득 하늘과 바다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직장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특히 해외로 나가 평화롭고 여유롭게 사는 이들을 볼 때면 '생(生)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의문마저 들게 된다. 휴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눈앞이 깜깜하다. 매일 반복되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떨쳐야 하나 겁이 날 정도다. 실제로 지역의 직장인들은 어떤 휴가 후유증에 시달리며, 어떤 증세를 보이고 있는지 들어봤다.

◆가벼운 후유증, '멍하고·졸리고·기빠지고'

휴가를 다녀오니 몸이 말을 안 듣는다. 그나마 정신적 후유증보다는 그 기간이 짧다. 또 누구나 어느 정도 '휴가 후유증'이라는 불청객을 만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수는 해야 한다. 빨리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조금만 신경을 쓰면 된다. '나만 그렇다'는 생각은 버리자.

동아백화점 인사팀 박신영(25·여) 씨는 가족과 함께 태국 여행을 다녀와서 '멍 때리기' 9단이 되어 버렸다. 파타야의 넓은 해변과 에메랄드빛 바다, 청명한 하늘 등이 마치 지상낙원 같았던 휴가지의 풍경이 내내 잊히지 않는 것.

이렇게 멋진 휴가를 보내고 돌아왔는데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사무실은 떠날 때와 다를 바 없는데도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 건지. 컴퓨터를 켜는 순간 바탕화면의 푸른빛은 에메랄드빛 해변을 떠올리게 했다. 이렇게 멍 때리다 정신을 차리고 업무에 몰입하려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배가 갑자기 아팠다. 병원에 가니 휴가 갔다 장염까지 선물로 얻어왔단다. 박 씨는 "휴가는 휴가, 이젠 장염 투혼으로 정상 업무 복귀에 시동을 걸었다"고 말했다.

금융계에서 일하는 정종우(35) 씨는 휴가 차 홍콩·마카오로 다녀왔는데, 카지노에서의 짜릿한 승부를 잊지 못해 아직 직장에 돌아온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정 씨는 "휴가 때 만사를 잊고 있다 다시 골치 아픈 업무를 보려니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며 "혼자 휴게실이나 옥상 등에 가서 담배를 피우며 휴가 때 좋았던 기억만 떠올리고 있다"고 했다.

◆무거운 후유증, '회의감 들고, 사표 쓰고'

휴가를 다녀와 심각한 상황에 빠져드는 경우다. 심리상담을 받을 필요도 있고, 회사 동료들의 조언이나 도움이 있어야 빨리 극복할 수 있다. 세상 모르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다 휴가 때 삶의 변화 또는 일탈을 꿈꾸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김정만(33) 씨는 휴가 이후 그동안 내가 왜 회사에 목숨 걸고 일했나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네 살 아들과 여섯 살 딸이 어떻게 자라는지 무관심했다 휴가를 통해 두 자녀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깨달았기 때문. 김 씨는 경북의 자연휴양림에서 자녀와 함께 보낸 휴가가 회사에 대한 충성심에 회의를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정말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았다"며 "앞으로 퇴근도 일찍 하고 회사에 무조건 희생하고 충성해야 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대구 성서공단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정판욱(가명·29) 씨는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온 뒤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정 씨는 친구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항주·소주 지역을 6박 7일 일정으로 다녀왔는데, 휴가에서 복귀하니 대구라는 곳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그는 "매달 140만~150만원을 받으며 단순 반복하는 일이 싫어졌다"며 "일단 사표부터 던지고 무역업체에 알아봐서 중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인생 항로를 바꾼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휴가 후유증 극복, '이렇게'

휴가 후유증은 정도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극복 방법도 자신에게 맞게끔 잘 찾아야 한다.

후유증 최소화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휴가 일정을 짤 때 '무작정 놀자' '1년 동안의 스트레스 한방에 날리자'는 생각으로 빡빡하게 잡기보다는 뒤탈을 예상해 다소 여유를 가지고 일정을 계획하는 것이다. 휴가 끝나기 1, 2일 전에는 집으로 돌아와 충분한 휴식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휴식을 취할 때는 따뜻한 물에 반신욕을 하거나 가벼운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휴가 복귀 뒤에는 생체 리듬을 빨리 찾는 것이 급선무. 일과 후 회식자리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휴가 복귀 후 일주일 동안은 매일 7, 8시간의 숙면을 취하고 그래도 피곤하다면 낮잠을 30분 정도 청하는 것도 좋다. 피로 회복을 위해서는 물을 자주 마시고 과일, 채소, 비타민 등을 충분히 섭취하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대부분 직장인들은 휴가 후 2, 3일이 지나면 생체 리듬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보통 생체 리듬이 깨지면 소화나 수면 등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약해지기 마련. 비정상적인 신체 리듬이 원래의 리듬을 찾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후유증이 10일 이상 지속된다면 병원을 찾거나 심리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서울 노원을지병원 최영은 교수는 휴가 후유증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휴가 돌아오기 전 마지막 날 직장 동료에게 전화를 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출근 후에는 틈틈이 즐겁다고 자기암시를 주고, 첫날 직장 동료들과 즐겁게 식사하기 ▷휴가 직후에 중요하거나 업무 부담이 큰 일이 닥치지 않도록 스케줄 조정하기 등을 소개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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