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성우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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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어느새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어디서건 한동안 가만히 귀 기울이노라면, 귀울음소리 같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혹은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예의 그 울림 깊은 울음소리를 문득 듣기도 했다. 그 명명(鳴鳴)한 울음소리를, 시인은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라고 명명(命名)하고 있다.

귀뚜라미는 제 필생의 짝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모르스 부호 같은 타전(打電)을 보내고 있었던 것. 시적 화자도 자신의 몸 안에서 우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듣는데, 그것 역시 귀뚜라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울음(울림)의 타전!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오는 밤이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는 들려오곤 했던 게다. 그 울음소리란 고추씨 같아서,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꽤나 매운 것이었다. 귀뚜라미도 나도 이렇듯 '매운' 그리움을 질료 삼아, "맵게 우는 밤"이 이슥해간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참 멀리까지 간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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