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경북도 교육청의 이상한 정책

경상북도 교육청이 고입 선발 시험의 부활을 공식화했다는 이번 주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현재 중학교 1학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2013년부터 고입 선발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나는 오보겠다 싶어 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자는 이미 지난 3월에 결정된 사항을 교육청에서 다시 확인한 거라고 일러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을 돌아보거나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고교 입시를 부활시킨다는 기사를 보면서 교육청 고위직 인사들은 중학교 때 공부를 썩 했나 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내 개인 얘기를 좀 하자면, 난 중학교 때 학교 성적이 엉망이었다. 그림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자 느닷없이 자기실현의 욕구가 격렬하게 일어나 학교 공부를 팽개치고 하루 여덟 시간씩 화판만 껴안고 있었다. 만약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지 않았더라면 난 고등학교도 들어가질 못했을 테다. 그리고 지금처럼 평생 공부하며 글 쓰는 직업을 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 젊은 후배와 중학교 시절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명문대를 나온 그 후배는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도 했는데 당연히 중학교 때도 공부를 꽤 했다. 후배는 내 중학 시절의 재미난 얘기를 듣더니 자신은 왜 열심히 공부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고 대꾸했다. 단순히 '공부 기계'에 불과해서, 학교와 집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중학교 시절은 한 인간이 최초로 자아와 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눈을 뜨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춘기라고 하는 것이다. 삶을 향한 자각이 솟구치는 시기에 과연 공부만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자각을 통해서, 혹은 공부를 의미 있게 간주해서 공부에 몰두하는 아이들은 거의 전무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아와 세계에 대해 각성할 때 아이들은 공부 외에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현상이다. 학교 공부를 못했으나 뛰어난 창의력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들의 예가 얼마나 많은가. 만약 그렇다면, '각성'의 대가로 고등학교조차 들어갈 수 없다면 이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경북도 교육청은 고입 선발 시험을 치름으로써 '명품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품이라는 말이 갖는 소비적 이미지를 고려할 때 '명품 교육'이라는 언어 조합도 이상하거니와 중학생들에게 과도한 학력 요구가 좋은 교육으로 가는 교량이라고 여긴다는 건 더 이해할 수 없다.

교육은 한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담되, 이상적인 가치를 폭넓게 수용하려는 의지를 전제로 해야 한다. 학생들이 수행하는 공부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네 살배기 어린애가 "이 나무 이름 뭐예요?" "하늘은 왜 파래요?" "태양은 왜 땅에 떨어지지 않나요?" 하고 끊임없이 묻는 게 '공부'이듯이, 자아와 세계의 구체성을 처음 만나는 사춘기 학생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낯모르는 현상에 대한 의문이 바로 공부인 것이다. 이런 공부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학생에게 학교 공부 못했다고 삼류 고등학교에 보내려는 게 바로 고교 입시 제도가 아닐까? 그런 '몰두형'이 극소수라고 치부한다면 이는 사춘기의 특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강조하는 창의성과 관련해서도 고교 선발 입시제는 적합지 않다. 창의성은 속성상 규격적인 학업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육청은 일선 학교에 창의성 교육을 하도록 강조하지만 고교 입시제는 그 자체로 비창의성을 강요하는 셈이다.

교육청은 고교 입시 부활의 부작용으로 사교육이 조장될 것이라는 반대 여론을 걱정하는 모양이다. 물론 부모들의 사교육 욕심도 걱정거리긴 하겠다. 하지만 젊은 영혼들에게 입시 강박을 형성시키는 것에 비해 사교육 시비는 아주 사소하게 보인다. 실로 중요한 것은 단기적으로 학력을 끌어올리려는 일률적인 고교 입시 정책이,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공부'를 갈망하는 각성기(覺醒期)의 학생들에게 과연 타당하냐 하는 점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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