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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의 시와 함께] 끗발-건빵(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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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은 고무신 뒤축 끌면서 아버지 데리러 간다

주막집 불빛이 밤길 어둠을 끌어안는다

방문에 비친 훌쭉한 아버지 그림자

-아부지 지베 손님 왔서예, 빨리 가입시더

오지도 않은 손님 왔다는 말은

문지방에서 걸려 넘어진다

-쪼매마 있다가 간다 캐라

툭 던져주시는 건빵 한 봉지

화투판 냄새 가득 밴 건빵 위로 달이 뜬다

걸신들린 것처럼

아버지 한 봉지 다 털어 먹는다

빈 봉지 같은 아버지 주막집에 두고

건빵만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짧은 그림자 길게 널며 가는

아홉 살 겨울이 사무치다

울긋불긋한 화투판보다

더 마른 침 도는 기억 한 봉지

아홉 살 시절의 기억이란 기억저장고의 밑바닥에 각인되어 있다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과자 냄새처럼, 우연한 촉발에 의해 추억의 수면 위로 흑백영화의 한 장면으로 떠오르곤 한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 신장염 때문에 한동안 매일 혼자서 동네 의원에 주사를 맞으러 다녔었다. 주사를 맞고는 그 옆 만화방에서 박부성의 만화책을 빌려다보는 재미로 주사의 스트레스를 이겨냈던 거 같다. 만화를 통해 한글을 깨우쳤음은 물론이다. 초등학교 일학년 땐 배탈이 나서 급히 집으로 달려오다가 대문을 막 들어서는 순간, 설사를 바지 속에 싸고 말았는데, 난감함과 안도가 교차하던 그 찝찝한 촉감을 기억한다.

시인은 영천 금호 사일못 안동네가 고향이라 한다. 주막집 화투판의 "빈 봉지 같은 아버지" 대신 건빵만 '데불꼬' 집으로 가는 길, 못물 위에 뜬 달이 '허겁지겁' 따라 왔을 게다. "짧은 그림자 길게 널며 가는/ 아홉 살 겨울"의 어느 달밤은 시인의 기억 밑바닥에서 사무치며 떠올라, 여기 "울긋불긋한 화투판보다/ 더 마른 침 도는 기억 한 봉지"로 거듭났다. 어린 딸을 추운 달밤에 건빵 한 봉지로 혼자 돌려보낸 그 아버지의 '끗발'은, 이후 파죽지세로 올랐기를 바라지만, 아마도 그리 신통하진 못했으리라. 그게 인생인 것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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