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이 봉화를 거쳐 청량산 줄기를 타고 흐른다. 봉화와 안동 접경이다. 청량산과 낙동강이 부딪쳐 만든 벼랑과 절벽에는 온갖 이야기가 흐른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남으로 내려왔다. 청량산을 거쳐 안동까지 왔다. 퇴계는 강변 오솔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향했다.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을 도왔던 이름 모를 임 장군이 그 길을 걸었고, 몽골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도 남편인 공민왕을 따라 걸었다.
안동 도산면 가송리. 가사리와 소두들(송오)을 비롯해 골가사리, 고리재, 올미재 모두 가송리의 자연마을이다. 가송리는 소나무가 빼어나다. 가사리(佳士里)의 '가' 자와 송오의 '송' 자를 따왔다. 퇴계가 가사리 냇가의 솔이 아름답다고 이름 붙였다는 얘기도, 마을 입향조가 아름다운 소나무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도 있다.
가송리에는 공민왕과 퇴계에 얽힌 이야기가 풍부하다. 낙동강을 건너는 출렁다리를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건설한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마을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령이 600여 년 동안 서려 있다. 노국공주를 모신 부인당과 600여 년 된 당산나무(느티나무).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름 하루 전과 단오 하루 전, 부인당과 당산나무 앞에서 동제를 지낸다. 단오 전날에는 간단하게 지내지만, 정월대보름 전날의 동제는 풍물을 앞세운 길굿, 유교식 제례, 신풀이, 마을회의 등 절차를 밟는다.
정월 초이튿날 마을 사람들은 부인당에 있는 서낭대를 꺼내 오색 한복으로 장식하고, 위에 꿩 깃털을 매단 뒤 신내림을 받는다. 당주를 정하는 방식이다. 신내림이 제대로 안 되면 청량산에 있는 공민왕 사당에 다녀오곤 했다. 노국공주의 남편을 찾아간 것이다.
김은하(63) 씨는 신내림을 통해 당주를 정하던 50년 전 동제를 회고했다.
"부인당에서 꿩 깃털, 서낭대를 꺼내 신내림이 오는 사람이 대를 잡는 거지. 비는 사람이 봉화 친정(공민왕 사당)을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 물어본다고. 그래가지고 가자 하면 온 동네가 다 따라나서야 해. 저 산성에 공민왕당이 있잖아요. 그게 친정이라 해가지고 4년마다 한 번씩인가 갔어요."
동제는 시작된다. 당주와 마을 사람들은 제수용품을 지게에 나눠지고, 관솔가지에 불을 붙인 채로 부인당으로 향한다. 제는 부인당 앞에서 한 번, 40m쯤 내려와 당산나무 앞에서 또 한 번 지낸다. 풍물이 흥을 돋워 신을 만족시킬 때까지 제는 계속된다. 풍물로 흥이 돋워지면 (서낭)대가 부인당 쪽으로 꾸벅 절을 하듯 기울어진다. 한 번 기울어지면 그때 입혀놓은 옷을 걷어 부인당에 걸고, 두 번째 기울어지면 대 꼭대기에 걸어놓은 꿩 깃털을 뗀 뒤 본당(부인당) 제사를 마친다. 본당 제사 뒤 당산나무 앞에서 거리당 제를 올린다. 이때 귀신들한테 던져주는 떡을 받아먹으면 아이들이 1년 동안 감기가 들지 않는다고 해 항상 동네 아이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지금은 신내림을 받지 않고 마을회의를 통해 당주를 정하지만, 동제의 전통은 공민왕 몽진 이후 약 65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안동(옛 복주·福州)과 봉화에는 고려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1361년(공민왕 10년) 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장호원, 충주, 조령, 청량산 자락을 거쳐 안동으로 피란왔기 때문이다. 노국공주도 이때 함께 왔을 터이다. 공민왕은 이로부터 4년 뒤 임신한 노국공주가 출산 중 아기와 함께 숨지면서 실의에 빠졌다.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했다.
1341년 어린 나이(12세)로 몽고에 볼모로 갔던 왕자. 그리고 8년이 지나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공주(보탑실리공주)와 결혼한 뒤 2년(135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왕좌에 오른 공민왕. 왕은 귀국한 뒤 곧바로 몽고의 관제와 관리 복장, 관습을 폐지하고 고려의 자주정신을 꾀했다. 노국공주는 왕의 사랑을 받았다. 자신이 태어난 고국을 배척하고 왕의 반원정책을 따랐던 것.
그 사랑은 650년이 지난 지금도 봉화 명호면 북곡리 공민왕 사당, 안동 도산면 원천리 왕모당, 예안면 신남리 며느리당과 딸당, 용상동 공민왕당, 풍산읍 국신당 등에서 기려지고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청량산을 낀 봉화와 안동 사람들의 영원한 신이자, 마을 지킴이인 셈이다.
◆퇴계와 성성재의 청량산
가송리 낙동강변은 청량산 자락이다. 퇴계와 제자 성성재의 사랑을 듬뿍 받은 곳이다.
퇴계 이황은 13세(1513년)에 처음 숙부인 송재 이우와 형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갔다. 책을 읽고 학문을 익혔다. 이후 벼슬을 마치고 낙향한 뒤에도 줄곧 산을 찾았다. 고향인 안동 도산면 온혜리를 출발해 토계·단천·가송리를 거쳐 산으로 들어간 것. 퇴계의 제자 성성재 금난수(琴蘭秀)도 35세(1565년) 때 청량산 줄기를 타고 내린 가송리 강변에 정자를 지어 '고산정'(孤山亭·일동정사)이라고 이름 붙였다.
퇴계는 조선 풍기군수(1541년)를 지낸 주세붕의 '청량산록' 발문에서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 거리에 있는데, 내가 나고 자란 집이 그 노정의 중간쯤에 있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르면 점심 무렵 아직 배가 꺼지지 않을 때 다다를 수 있다. 비록 경계는 다른 고을에 있지만, 실지로 우리 집안의 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봇짐을 지고 이 산을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안동 예안·도산면, 봉화 재산·명호면에 걸친 청량산. 퇴계를 비롯한 안동 사람들은 예안면 부포리, 도산면 분천·토계·단천·가송리 등을 거쳐 청량산을 올랐다. 봉화에서는 명호면 호명·관창리를 거쳐 산으로 향했다.
퇴계는 청량산 가는 길목의 제자가 지은 고산정에 자주 들러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고산정 앞 낙동강 물이 청명했고, 뒤로 청량산 줄기가 뻗어내려 풍광이 빼어났기 때문이리라. 고산정 앞은 옛 나루터였고, 맞은편에는 고산(孤山·독산)이 홀로 솟아 있다. 고산은 '거북이가 물에 잠겨 죽은 형상'이라고 '구사잠수'(龜死潛水)로도 일컬어진다. 고산정 안팎의 절벽은 마치 병풍을 친 것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내병대(內屛臺)와 외병대로 불렸다. 물 깊은 오미소, 강 건너 고산, '배를 괴어놓던 바위'인 괴선암 등이 고산정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다.
손연모(74) 씨는 "고산정 앞 절벽이 암석이 남아가 있는 거지. 학자들이 이름을 지어났어. 고산정에서 보고 절벽이 겹쳐 있다고 그거를 외병대라고 해, 바깥 병풍. 고산정 쪽으로 병풍의 안쪽 같다고 내병대라고 하지"라고 했다.
고산정 옆에는 '오학번식지'(烏鶴繁殖地)라고 쓰인 자그마한 비석이 있다. 이곳에는 검은 학(烏鶴)이 해마다 날아와 새끼를 낳고 가던 곳이라고 한다. 이 푸른빛을 띠는 검은 학은 원래 고산 위 절벽 학소대(鶴召臺) 자리가 번식지였는데, 어느 날 바위가 내려앉아 현재의 고산정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김은하 씨는 "학이 산 위 학소대에 있다가 이리 이사를 왔어. 검은 학이 해마다 날아왔지. 덩치가 크고 다리가 뻘개, 몸은 까만데. 아주 까만색이 아니고, 초록빛. 푸르면서 검은색이 나는 그런 빛깔이었다고. 해마다 와서 새끼를 쳐 갔는데, 올 땐 두 마리였는데 갈 때는 세 마리, 네 마리가 날아간다"라고 말했다.
퇴계와 제자 성성재가 아꼈던 고산정 주변에는 그렇게 '외로운 산'(고산), '푸른 빛깔의 검은 학'(오학),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내·외병대) 등이 오롯이 남아 있다. 퇴계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이 그 발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흐뭇해할 터이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안태호·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이지은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