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비파열 뇌동맥류 앓는 정숙화 씨

'늙고 병든 짐' 자식에게 어떻게 의지하나

정숙화(가명·57·여) 씨는 손을 머리에서 뗄 수 없다. 비파열 뇌동맥류 의심 진단을 받은 뒤 망치로 치는 듯한 심한 통증이 매일 그녀를 괴롭힌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정숙화(가명·57·여) 씨는 손을 머리에서 뗄 수 없다. 비파열 뇌동맥류 의심 진단을 받은 뒤 망치로 치는 듯한 심한 통증이 매일 그녀를 괴롭힌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밥은 먹고 다니나."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아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만나서도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정숙화(가명·57·여) 씨가 10년 만에 만난 큰아들 성창환(가명·35) 씨에게 처음 건넨 말은 '밥'이었다. 어색했다. 10년 전 집을 떠나 혼자 지내다 늙고 병들어 아들을 다시 찾은 것이 못내 미안했다.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정 씨는 올 3월 비파열 뇌동맥류 의심 진단을 받았다. 언제 터질지 모를 정 씨의 뇌혈관은 아들을 다시 만나게 한 '핏줄'이 됐다.

◆ 자식을 그리워할 수 없는 엄마

지난해 겨울부터였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던 통증. 머리에 집중되던 것이 무릎과 종아리로, 발가락까지 퍼졌다. 똑바로 발을 내디뎌도 몸은 왼쪽으로 쏠렸다. 병원에 가려고 나서는 것조차 두려웠다. 혼자 산 지 10년. '아프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겐 수술을 받을 돈이 없었다.

그래도 병원을 한 번 갈 때마다 진료비와 약값을 더해 10만원을 넘게 낸다. 목숨만 부지할 정도로 병원을 찾고 있지만, 의료진은 "빨리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비파열 뇌동맥류가 의심된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알음알음으로 알아보니 수술비만 1천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꿈만 같은 돈이다.

병든 몸뚱이 때문에 10년간 연을 끊고 살았던 자식들에게 연락하는 염치없는 엄마가 되기 싫었다. 유일한 연락통은 막내딸 지연이(가명·31)였다. "엄마, 우리집에 와." 냉골에 누워 끙끙대는 나를 찾아왔다. 눈물이 났다. 무능한 어미를 보듬어주려는 딸의 마음 때문이었다. 딸 집에 머무르며 두 손자의 재롱을 봐도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할머니는 짐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위 월급은 100여만원. 네 식구 먹고 살기도 팍팍한 처지에 나마저 짐이 되긴 싫었다.

막내 집에서 나와 대구 북구 고성동에 월세 15만원짜리 방을 구했다.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있을 때면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큰아들과 둘째딸이 미칠 듯이 그리워졌다. 제 발로 집을 떠난 어미가 어떻게 다시 연락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나는 자식을 그리워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 집을 떠나다

나는 10년 전 집을 떠났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일이 지독하게 느껴졌다. 늦은 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가출이었다.

그때는 건강이 무기였다. 식당에서 설거지와 주방일을 하며 한 달에 80만원을 벌었다. 혼자 지낼 방도 하나 구했다. 10년간 악착같이 모은 돈이 500만원이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지난 2008년 1월 동구 신암동 동구시장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 보증금 300만원과 월세 30만원,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업이었다. 내 인생에 돈 복(福)은 없었다. 손님이 찾지 않는 식당에서 식어가는 떡볶이만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했다. 보증금이라도 건지려 1년 만에 가게를 뺐다.

가게를 정리하던 그날, 냄비가 잔뜩 쌓여있던 바닥에 내 몸이 넘어졌다. 머리를 망치로 '쾅쾅' 치는 듯한 고통이었다. 매일 밤 통증은 내 머리를 짓눌렀다. 전 재산의 3분의 1을 검사받기 위해 쏟아부었다. 결과는 냉혹했다. 비파열 뇌동맥류. '빨리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 가난의 사슬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지독했던 가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남의 땅을 빌려 벼농사를 지었던 아버지는 1남 3녀를 키우기 위해 평생을 뙤약볕 아래서 보냈다. 엄마는 돈이 필요할 때면 이웃집에 되쌀을 팔았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나는 그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래도 모두가 힘들었던 그 시절의 가난은 견딜 만했다. 다들 못 배웠고 함께 배를 곯았으니까.

세월이 흐르고, 결혼 뒤 직면한 가난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어제의 가난보다 오늘의 가난이 더 무서웠다. 다른 가정과 비교할수록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난한 부모는 아이들 학교 공부도 제대로 시켜주지 못했다.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 남편이 막노동을 해 벌어오는 돈으로 1남 2녀의 학교 공납금을 내는 것도 벅찼다. 둘째 지수(33)는 결국 고등학교를 1년간 다니고 그만뒀다. 둘째가 학교를 그만두던 날 혼자서 펑펑 울었다. 미안했다. 내 자식들이 부모를 잘 못 만난 탓이었다.

지난주 처음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뭔지 알게 됐다. 판잣집이 촘촘히 밀집한 이 동네에는 수급자 투성이였다. 어제 찾아간 주민센터에서 "신청서에 자식들 지장을 받아오라"는 말을 들었다. 나를 부양할 수 없다는 각서를 자식들에게 받아오라는 뜻이었다. 다음 주에 나는 둘째 딸을 만나야만 한다. 면목이 없는 어미는 차마 전화를 걸 수 없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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