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함박눈이다. 아이들이 우르르 병실 밖으로 몰려나간다. 아파서 병원에 온 아이들이지만 동심은 언제 어디서나 발동하는 모양이다. 가운을 입은 채 나도 따라나선다. 건물 밖 흡연실의 나이 지긋해 보이는 환자도 상기된 표정이다. 뽀얀 담배연기도 신이 난 듯 하얀 눈 속으로 빨려든다. 막 쌓이기 시작하는 눈으로 작은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다. 다시 진료를 시작한다. 올해 내내 행복할 것 같다.
퇴근 후 한참 지났는데도 창밖은 아직 보름 밤 같다. 하얀 눈과 시가지의 불빛이 어우러져 대기는 신비스런 보랏빛이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던 어린 아들이 우리도 나가보자고 한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자야 할 시간"이라고 하니 "오늘 하루만 그럴 것인데요. 뭐!"라며 내 음성을 흉내 낸다. 빤히 쳐다보는 표정이 간절하다. 장화와 모자를 준비하고 장갑을 낀다. 목도리를 두르고 장난감 삽을 드니 남편도 같이 일어선다. 옛날 눈 내린 수성못에서 스케이트 타던 생각이 난다고 한다. 할 일이 남아 있던 나는 둘이서만 나갔다 오라고 하니 목소리를 낮추어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아요"라고 한다.
마당에 내려서니 다른 가족들도 열심히 설경을 카메라로 담고 있다. 우리는 눈을 흩뿌리고 눈싸움을 했다. 아이는 눈 위를 뛰어다니며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눈을 단단하게 뭉쳐 굴리기 시작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금방 커졌다. 그 보드랍고 가벼운 송이들이 뭉쳐지자 어찌나 무겁고 단단해지던지 참으로 놀라웠다. 모두가 힘을 합쳐 각자가 굴린 것을 크기대로 하나씩 쌓아 올렸다. 삼단으로 된 거인 눈사람. 솔가지를 꺾어 눈썹을 붙이고 나뭇가지로 코를 만들었다. 예쁜 입은 단풍잎으로 달았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양쪽에 꽂아 팔을 만들었다. 그 끝에 빈 캔을 꽂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 마시는 눈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함박꽃처럼 웃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는 자기가 처음 만든 친구라며 마주 보고 한참을 서 있다. 여러 번 다독이고 껴안아주고 뽀뽀를 한다. 언제까지나 녹지 않고 계속 서 있으면 좋겠단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 때때로 마음을 다져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고 싶다. 행복의 순간과 시틋한 감정이 반반인 무덤덤한 날들에서도 눈 내리는 날의 들뜸처럼 행복해지고 싶다. 1%만 행복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도 그 비율은 51대 49가 되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블랙'의 대사 한 자락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인생은 아이스크림이다. 녹기 전에 맛있게 먹어야 한다"라고.
정명희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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