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오빠부대만 있나요…삼촌부대·이모부대가 뜬다

아이돌 그룹·배우·가수에 열광 30·40대 그들은 누구

한효주의 삼촌팬인 양준혁 전 삼성라이온즈 선수. 그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한효주의 팬임을 자처해 화제가 됐다.
한효주의 삼촌팬인 양준혁 전 삼성라이온즈 선수. 그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한효주의 팬임을 자처해 화제가 됐다.
인터넷 카페 블레싱유천이 지난달 22일 대구과학대에서 열린 JYJ 팬사인회장에 내건 플래카드. 이모팬들이 늘어나면서 플래카드의 문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인터넷 카페 블레싱유천이 지난달 22일 대구과학대에서 열린 JYJ 팬사인회장에 내건 플래카드. 이모팬들이 늘어나면서 플래카드의 문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배용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배용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배사아모' 카페.

지난달 22일 오후, 직장인 김모(33·여) 씨는 출장 핑계를 대고 회사를 빠져 나와 대구과학대학으로 향했다. JYJ 대구 팬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김 씨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10대들 틈바구니 속에 자리 잡은 30·40대 여성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자신과 같은 이모팬들이었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송된 KBS2 TV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때문에 유천의 팬이 되었다는 한 여성은 15일 동안 한약재를 달여 만든 탈모방지 샴푸를 선물로 들고 왔다. 유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블레싱유천에서는 '유천아! 지켜줄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걸었다. 블레싱유천은 지난해 9월 결성됐다. '성균관 스캔들'의 주인공 유천을 응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카페에는 30~60대 여성 5천2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이진수(34·대구 수성구) 씨는 소녀시대 열혈팬이다. 그의 방은 소녀시대 브로마이드로 장식돼 있다. 가끔 컴퓨터로 소녀시대 동영상을 틀어 놓고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따라하기도 한다. 그는 새 앨범이 나오면 득달같이 구입한다. 시간이 허락하면 팬사인회와 방송 녹화 현장에도 찾아간다. 그는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좋아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소녀시대가 예쁘고 귀여워서 응원해 주고 싶어 팬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를 모두 외우고 공연장에서 풍선을 흔든다. 팬사인회에 참석하고 방송 녹화 현장도 찾는다. 감수성 많은 10대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이모·삼촌팬들의 이야기다. 이모·삼촌팬은 조카뻘 또는 자식뻘되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까닭에 붙여진 닉네임이다. 특히 이모팬은 국립국어원에 신조어로 등록돼 있다. 우리 사회에 부는 이모팬 열풍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모·삼촌팬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 은퇴한 전 삼성라이온즈 선수 양준혁(42) 씨는 배우 한효주의 삼촌팬이다. 그는 한 방송에 출연, 공개적으로 한효주 팬임을 밝혀 화제가 됐다. 10대가 주도하던 팬덤(fandom·특정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현상)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모부대와 삼촌부대를 조명했다.

◆그들은 누구?

새로운 문화코드로 자리 잡은 이모팬과 삼촌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집단이 아니다. 이들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1980년대 본격적으로 형성된 오빠부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중반 싹트기 시작한 팬덤문화를 접하고 자란 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거부감 없이 연예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초 아이돌 스타 시대를 연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하던 10·20대 팬들이 자라서 이모·삼촌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들 중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성팬이었다가 동방신기·빅뱅 등을 좋아하게 된 경우가 많다.

욕구를 억제하기보다 자유롭게 분출하기를 권하는 사회 분위기도 이모·삼촌팬 출현에 한몫을 담당했다. 요즘 30·40대는 그들 아버지 세대의 30·40대 때와 많이 다르다. 자유롭게 표현하고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심지어 50·60대들도 이모·삼촌팬 대열에 합류하면서 저변은 더욱 넓어졌다.

여기에 인터넷의 편리함과 소통 능력이 가미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이모팬과 삼촌팬이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이면서 엄청난 파워를 가진 주체로 전면에 부상했다. 소속사가 관리하는 공식 홈페이지보다 인터넷포털사이트에 산재해 있는 각종 팬클럽이 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국식 팬덤문화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달라진 팬 문화

이모·삼촌부대가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공연장이나 촬영장 분위기도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 오빠부대가 주를 이루던 시절, 콘서트 현장에 가면 "오빠~" 소리만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생~" "누나 왔어~" "이모야~" "아가~" 등으로 다양해졌다. 팬들이 들고 오는 플래카드 문구도 변했다. 천편일률적인 '오빠 사랑해'에서 지금은 '내가 지켜줄게' '네가 자랑스러워' 'OO야 멋지다' '누나가 왔다' 등으로 다채로워졌다.

팬들이 주는 선물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인형·사탕·초콜릿 등이 선물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보양식·건강보조식품·과일 등으로 다양해졌다. 특히 여성팬들이 많은 남자 배우의 촬영장에는 온정이 넘친다. 정성스럽게 만든 엄마표 도시락이 등장하고 스태프들에게 커피와 빵을 돌리는 것도 다반사가 됐다.

이모부대나 삼촌부대가 가진 경제적인 여유는 아이돌 스타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음반 구입이나 공연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이모부대와 삼촌부대가 음악파일 불법복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음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JYP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원더걸스 음반판매량은 10대 팬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를 보이고 있다. 30·40대 삼촌팬의 구매가 적지 않다. 선착순 100명으로 제한되는 원더걸스 사인회에 30·40대 남성팬들의 모습이 보이고, 멤버들의 생일 때 한약을 보내오는 한의사를 비롯해 적지 않은 가격대의 선물을 보내는 30대 이상 남성팬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 연예인 우리가 챙긴다"

소속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직접 챙기는 셀프 팬덤문화도 발달하고 있다. 각종 시상식이 열리는 연말이면 자신이 지지하는 연예인이 수상할 수 있도록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팬클럽 사이트마다 투표할 수 있는 주소를 링크해 놓고 투표 상황을 생중계하며 투표를 독려하는 것은 이제 일반화됐다. 소속사에서 만든 팬클럽에 만족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팬클럽을 만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배우 권상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권사줌'을 만들었다. '권상우를 사랑하는 아줌마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결혼한 아줌마가 가입 대상이다. '배용준을 사랑하는 아줌마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진 '배사아모'라는 팬 카페도 결성돼 있다. 소녀시대에게는 '소시당'이 있다. '소녀시대당'의 줄임말로 30대 이상 남성 회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다고 모래알 같은 성격을 띤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프라인 모임도 꾸준히 가지며 친목을 다진다. 2006년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개봉되었을 때 강동원과 이나영 팬클럽 회원들이 영화관을 아예 전세 내 단체 관람행사를 연 것은 온라인 모임을 뛰어넘어 단체 결속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이모팬들은 한류스타 얼굴을 보겠다며 밥 먹듯 비행기를 타는 일본의 한류팬들 못지않게 활발한 오프라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종휘 문화평론가는 청소년 중심으로 획일화된 대중문화 생산 방식에 다양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팬클럽 문화가 30대 이상 기혼자들에게 확산된 것은 대중문화의 다양성 확보에 도움을 준다. 성인들이 의식적으로 대중문화 코드를 공유하면서 팬클럽을 자발적 사회활동의 매개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고 설명했다.

◆그들이 열광하는 이유

이모·삼촌팬을 보는 시각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들을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나이 먹고 주책이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핵심이다. 특히 이모팬들에 대한 시선은 더 냉혹하다. '빠순이'가 연예인에 빠져 있는 어린 팬들을 지칭하는 비속어라면 '빠줌마'는 연예인에 빠져 있는 아줌마를 뜻하는 비속어다. 하지만 이모·삼촌팬들의 열정은 누구 못지않다. 스타를 쫓아다니는 10대 열혈팬들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던 세대들이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블레싱유천 회원인 한모(35·여) 씨는 "10대팬들 속에 있을 때 홀로 섬이 된 느낌이 들어 주책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것은 생활의 활력소가 될 뿐 아니라 한 살 한 살 어려지는 기분이 들어 팬클럽 활동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인 김모(34·여) 씨는 "아줌마들의 행동 범위는 매우 한정돼 있다. 집과 계모임, 학부모회가 모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달라졌다. 팬클럽 친구들이랑 고민을 나누고 여가 생활도 함께 즐긴다.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활이 무척 즐거워졌다"고 설명했다.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소녀시대 팬인 권모(37) 씨는 "소녀시대를 보면 마치 순정만화의 주인공을 대하는 느낌이 들어 어린시절 좋아했던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순정을 갈구하기에는 너무 세상을 알아버린 내게 아직도 말랑말랑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고 했다.

안민호 숙명여대 정보방송학과 교수는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이모팬 문화는 스타와 팬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할 뿐 아니라 자칫 무료해질 수 있는 중년 여성의 생활에 활기를 제공한다. 이모팬들은 아이돌 스타를 통해 젊음에 대한 향수와 욕구를 느끼고 건강한 취미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일상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이모팬 문화는 권장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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