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⑤계산동 이상화 고택

상화 "빼앗길 들에도" 선창에, 빙허 "반드시 봄은 온다" 화답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오철환 소설가·대구시의원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오철환 소설가·대구시의원

계산동(桂山洞)은 약전골목이 된 대구읍성의 남쪽 성곽 옆에 신천을 끼고 형성된 동네를 말한다. 계산동의 '계산'은 계수나무가 있는 산을 의미하는데 계산은 현재의 동산병원이 들어선 동산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동산은 東山과 銅山 두 가지를 다 쓰고 있는데 1905년 대구지도에는 東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동산 바로 밑에 신천이 흘렀으며 그 신천을 따라 형성된 동네가 계산동이다.

계산동은 서성로, 남성로와 서문로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서문시장과 염매시장을 인근에 두고 있어 조선시대부터 양반들과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인지 올곧은 근대 민족운동가와 뛰어난 문화예술인들이 이 지역에서 많이 태어났다.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 요절한 천재시인 고월 이장희,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 교육자이자 시인이며 정치가인 한솔 이효상, 이상화의 형 독립운동가 이상정, 이상화의 동생 IOC 위원 이상백, 서예가 회산 박기돈,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 경향지 '집단'의 편집인이자 평론가 남만희, 문인화의 대가 죽농 서동균, 서상돈의 장남인 거부 서병조, '금잔디'의 작곡자 김진균, 대구 가두극장 창립멤버인 이원식, 영남지방에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영천한의원의 이호진, 천재 서양화가 이인성과 이쾌대, 시인 신동집, 사실주의 소설가 빙허 현진건, 천재음악가 박태원 박태준 형제, 서양화가 서동진 서병기 이여성 주정환, 3·1운동 학생시위를 주도한 시인 백기만, 한국영화의 토대를 닦았던 김유영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민족시인 이육사, 근대 평론의 지평을 연 육사의 동생 평론가 이원조, 세상사를 초월한 시인 공초 오상순, 소설가 최정희 등도 이 지역을 거쳐 갔다. 계산동 길 건너편 남산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한국 최초의 성악가 김문보, 문학평론가 이갑기, '근원수필' 저자이자 미술사가 김용준 등이 살았다. 이렇게 보면 계산동 일대는 훌륭한 우리 선조들의 스토리가 없는 곳이 없다.

-본문-

1938년 가을 어느 날 저녁, 동아일보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대구에서 문학 창작에 전념하고 있던 빙허 현진건이 이상화의 집으로 놀러 왔다. 빙허는 요절한 고월 이장희, 서양화가 소허 서동진과 동갑으로 상화보다 한 살 많긴 했지만 말 트고 지내는 동네 불알친구이다. 빙허의 술 실력을 잘 아는 터라 상화는 술상을 내오게 했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며? 잘돼 가나?"

"애정소설을 쓰고 있는데 잘 안 되네. 연애 경험이 시원찮아서…. 자네한테 코치를 좀 받아야 될 것 같아. 허허."

상화와 연애를 했던 손필연, 유보화, 송옥경, 김백희 등의 얼굴들이 빙허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상화의 핸섬한 얼굴, 매력적인 인간성 그리고 풍부한 감성이 낳은 당연한 결과라 여겨졌다. 이것은 한편으로 상화의 문학적 소양으로 체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빙허가 가장 부러워한 점이었다.

"코치 받을 거 뭐 있나, 직접 한 번 해보면 될 거 아이가. 참한 색시 하나 붙여줄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빨리 주선해 봐라."

'적도'(赤道)라는 애정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에는 석가탑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역사소설 하면 왕조비사가 아니면 지배계급과 기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빙허는 하층계급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고대신라의 사회적 모순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보고 싶다고 한다. 빙허의 창작 의욕이 상화에게 화끈하게 전해졌다.

"듣고 보니 일장기 말소사건같이 단발적인 이벤트보다 역사소설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것이 멀리 보아 우리 민족의 독립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구먼. 어쩌면 자네나 나의 진정한 의무일 수 있겠지."

"문학을 접하지 못하는 대다수 국민에게는 단발적인 이벤트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해 가는 것이 좋은 게 아닐까?"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나도 느끼고 있었어. 시를 통해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더라고. 교육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상누각이야. 내가 교남학교(대륜학교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도 그 때문이야. 내가 어릴 적에 다니던 우현학숙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세운 학교이고 교남학교는 우현학숙의 맥을 이은 민족학교라 더욱 애착이 가지. 나나 육사와 이원조도 교남학교를 통해 민족정신을 전수받았으니 교육의 힘이 위대한 것이지. 시란 것이 은유와 상징이니 배우지 못해 시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면 아무리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빙허는 상화의 말을 듣고는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켰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독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요즘 괜히 우울하고 암울한 생각이 들어. 일본이 조선인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고 일부 가난하고 몰지각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원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보고만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반대하고 나서자니 힘이 달리고…."

"상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자네 생각과 같을 걸세. 나도 마찬가지야. 경술년에 국치를 당했으니 벌써 이십팔 년이야. 일본은 점점 더 강해지는 거 같고 독립의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왜 우울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래도 태어나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도 있지. 경술국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우리와 같은 민족혼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그냥 놔두면 당연히 없지. 그러니까 교육이 필요한 거지. 우리가 죽기 전에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 민족정신을 전수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거 아닐까?"

"유태민족이 되느냐, 집시족이 되느냐는 우리한테 달린 거야. 민족혼만 살아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상화와 빙허, 두 사람은 술잔을 높이 들고 힘차게 건배했다.

상화가 "빼앗긴 들에도"라고 선창하자 빙허가 "반드시 봄이 온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켠 때문인지 두 사람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야, 빙허! 그만한 걸로 사내자식이 눈물을 흘리고 지랄이야! 지금 쓰고 있는 소설 탈고하면 나한테 제일 먼저 가지고 오는 거지?"

"알았어. 니나 잘 하셔!"

술판이 제법 무르익자 인근에 살던 소허 서동진이 술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 소허는 상화와 빙허의 동네 친구로 상화와 같이 교남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소허는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을 발굴한 대구의 근대화단을 이끌고 있는 실력 있는 서양화가였다.

"오! 빙허 왔나! 상화야, 빙허가 왔으면 재깍 나를 불러야 하는 거 아이가? 의리 없이 나를 쏙 빼놓고 둘이서만 술을 마시다니 이건 대구문단의 수치이자 비극이야. 미술이 문학보다 훨씬 더 역사가 깊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 그걸 알고도 화백을 괄시했다간 아마 큰코다칠걸."

방을 들어서자마자 소허는 설레발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교남학교 학생이 일본 학생들한테 맞아 많이 다쳤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막걸리 세 사발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 말을 들은 상화와 빙허는 마치 자기가 맞은 양 인상을 찌푸리며 술상을 치며 흥분했다. 상화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다그치자 소허는 숨을 고르며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교남학교 학생이 동성로에서 미모의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남학생들이 미모의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교남학교 학생 한 명과 일본인 학생 두 명이 일 대 이로 싸움이 붙었고 그 결과 교남학교 학생이 크게 다쳤다고 했다. 사춘기 학생들 사이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다음 일이 세 사람을 매우 흥분하게 했다. 순사가 출동하여 중앙파출소로 연행된 세 학생은 간단한 조사를 받았는데 일본인 학생 두 명은 바로 훈방 조치된 반면 크게 다친 교남학교 학생은 아직 유치장에 있다는 것이었다. 상화는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빙허와 소허도 상화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식식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약전골목을 따라 중앙파출소로 갔다. 문을 세게 밀어젖히며 파출소 안에 먼저 들어선 상화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나는 교남학교 교사 이상화요. 우리 학교 학생이 여기 잡혀와 있다는데 그 이유가 뭐요? 맞은 것도 죄요? 빨리 석방해 주시오."

"때린 두 사람은 훈방하고 맞은 한 사람을 가둬둔 게 말이나 되는 게요. 당장 석방해 주시오."

뒤따라 들어온 빙허도 상화를 거들었다. 근무 중인 순사들이 모두 상화와 면식이 있는 자들이었고 상화의 조부와 백부의 덕을 보았던 자들이라 세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을 소파로 안내하여 그들의 입장을 얘기하고는 안 그래도 곧 석방하려 했다며 유치장에 갇혀있던 학생을 석방하였다. 학생은 여학생과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이 죄스러운 듯 부끄러워했다. 상화와 소허는 학생을 데리고 나와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학생을 보낸 후 세 사람은 상화의 단골 술집으로 갔다. 상화는 돈 많은 명문가의 자제인데다 인물도 훤칠하여 대구 화류계에서 인기가 좋았다. 물론 가세가 기울어 전성기 때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왕년의 인기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주모는 상화가 들어가자 자지러지는 목소리로 그들을 맞았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기 무섭게 술상이 나왔다. 주모는 재빨리 막걸리 한 잔씩을 돌리고는 급히 다른 술자리 시중을 들러 가버렸다. 상화가 조금 전의 분을 삭이지 못한 듯 먼저 말문을 텄다.

"머리도 중요하지만 주먹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하잖아. 특히 우리같이 법의 보호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에는 더 그렇지. 법이야 평등하고 공정할 수 있겠지만 법 집행이 개판이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라 없는 설움도 억울한데 힘이 없어 맞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니야? 우리 힘을 기르자. 격투기를 배우자. 그렇지! 권투가 어때?"

"상화, 내일모레면 마흔인데 권투를 배운다는 건 난센스 아닌가?"

빙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학생들에게라도 가르쳐야지. 나라도 없는데 주먹이라도 굵어야지. 소허, 교장한테 권투부를 만들도록 제안하자. 아니, 어떻게 해서라도 만들어야겠어. 꼭 만들 거야!"

상화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주 앉아있던 빙허에게 잽 펀치를 날렸다.

"굿 아이디어! 베리 굿 아이디어!"

빙허와 소허는 너무 기뻐서 벌떡 일어나 얼싸안고 소리쳤다. 세 사람은 마치 나라를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건배했다.

"브라보!"

상화는 교남학교 교장 이효상과 다른 교사들에게 권투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또 설득하여 마침내 대구 교육계에서 최초로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창설하였다. 교남학교에 권투부가 생긴 후 이 학교 학생들은 나라 잃은 울분을 샌드백을 침으로써 달래었을 뿐만 아니라 두 번 다시 일본 학생에게 맞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상화와 빙허는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로 같은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43년 4월 25일 같은 날 타계하였다. 인연치고는 너무도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이상화의 고향 친구인 목우 백기만은 상화가 타계하기 약 두 달 전 병중의 상화를 마지막으로 찾아보았다. 상화는 벌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야윈 얼굴로 "집필하려던 국문학사를 탈고해 놓고 죽었으면 했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지…"하고 힘없이 웃었다고 했다. 갈등과 좌절에 함몰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이 땅의 대다수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상화도 술이나 종교 그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괴로워하다가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아침이 올 것을 굳게 믿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의연히 맞섰던 까닭에 상화는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샛별이 될 것이다.

소설가 대구시의원 오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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