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설거지, 건물 청소, 방문 판매. 온종일 일에 지쳐 파김치가 돼 들어오는 엄마. 똑딱. 차비 아낀다고 1시간 걸어 학교 가는 동생. 똑딱. 참 이번 달 학교 운영비는 어떡하지. 똑딱. 벌써 허기가 지네. 똑딱. 감독님 말씀대로 점심 급식 많이 먹어둘 걸 그랬네. 똑딱. 대체 키는 언제 자랄까. 똑딱. 난 생각이 많은 것 같아. 똑딱. 자꾸 떠오르는 걸 어떡해. 똑딱. 똑딱. 똑딱….
소연이는 튀어오르는 잡념을 후려친다. 오늘은 감이 좋은지 드라이브가 실수 없이 10번 연속 성공이다. 후련하다. 어둡게 짓눌린 가슴이 이내 환해진다. 내년 체전에서 좋은 성적 내면 엄마 얼굴도 환해지겠지. 똑딱. 똑딱. 똑딱….
대구시 달서구 성당동 상서중학교. 체육관 탁구실에서 16명의 선수들이 쉴 새 없이 라켓을 휘두르고 있다. 유난히 체구가 작아 눈에 띄는 1학년 김소연(13) 양. 143㎝에 29㎏. 운동선수치고는 작고 가볍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평소 체조선수라 부를까. 하지만 시합 때는 다르다. 2학년 언니들과 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볼을 치는 힘이 또래 선수들보다 뛰어난 강골이다.
소연이의 하루는 무척 바쁘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등교 준비를 서두른다. 일찍 일터에 나가는 엄마를 위해서다. 아침밥 짓는 것 빼고는 엄마 손을 빌리지 않으려 한다. 유니폼, 얼음물, 수건 등 준비물도 손수 챙긴다. 아침 설거지와 집안 정리도 소연이 몫이다. 게으름을 피울 겨를이 없다. 단칸방이라 제때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은 제법 철이 든 이란성 쌍둥이 범준이도 집안일을 도와 한결 수월하다. 4교시부터 체육관에서 맹연습이 시작된다. 휴식은 점심시간과 간식시간뿐. 훈련은 오후 7시를 넘은 시각까지 이어진다. 연습을 마친 뒤 빙빙 도는 시내버스를 타고 녹초가 돼 집에 오면 오후 9시. 이내 졸음이 밀려들지만 엄마 앞에서는 애써 피곤한 기색을 숨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스스로 하고 싶어 시작한 탁구다. 소연이는 한 번도 탁구를 포기해 본 적이 없다. 돌아가신 아빠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더욱 용기를 낸다. 소연이네는 사업하는 아빠로 인해 가정 형편은 여유로웠다. 그러나 소연이가 4살 때 아빠가 암 판정을 받고 1년간 투병 끝에 숨지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서너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소연이는 밤새 편안하게 잠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소연이는 이런 엄마를 보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실업팀이 목표다. 이제 중1. 대구에서는 수차례 우승을 했지만 전국대회 입상 경험이 없는 소연이는 마음이 급하다. 탁구 명문 상서여자정보고 진학이 예정된 소연이에게 진로의 윤곽이 잡히는 중3에서 고1까지 남은 2, 3년은 귀중한 시간이다.
소연이에게 얼마 전 뜻하지 않게 격려와 응원이 쏟아졌다. 경북대총학생회가 지난달 27일 대학축제 때 소연이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모금 행사를 진행했다.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의 한부모가정 자립 강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소연이네를 담당 복지사로부터 소개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학생들은 소연이에게 보내는 응원의 글을 풍등에 담아 밤하늘에 날리는 이벤트를 열고 풍등 판매 수익금과 모금액을 소연이 엄마에게 전달했다. 소연이가 후원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학생들에게 마음만 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던 엄마. 소연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날 처음으로 엄마의 눈물을 보았다.
"시합에서 지고 집에 가면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요. 그냥 미안하고 눈물이 나요. 이유 없이. 하지만 이젠 울지 않아요.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룰 자신이 있으니까요."
13살 탁구소녀의 꿈은 이미 날개를 펴고 비상 중이다. 지난밤의 풍등처럼 끝없이 날아오르는 일만 남았다.
글'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 취재 후기
학교서 주는 라켓 하나로 1년 버텨…후원이 필요합니다
상서중학교와 상서여자정보고 탁구부에는 소연이와 마찬가지로 탁구에 마음을 의지하는 학생들이 많다. 어머니를 여의고 휠체어 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김별님(16) 양도 그렇다. 다른 인기 스포츠와 달리 대체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선생님의 권유로 탁구를 시작한다. 상서중 탁구부 박태준 감독은 "기량이 있으면서도 어려운 형편 탓에 소질을 맘껏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상서중 탁구부 선수들은 라켓과 유니폼, 운동복을 학교로부터 지원받는다. 1년에 한 개씩이다. 그나마 다른 학교보다는 지원이 많은 편이다. 탁구화도 필요한데 개인이 구입해야 한다. 소연이의 경우 학교에서 사준 라켓 하나로 1년을 버틸 작정이다. 월세보다 비싼 탁구라켓을 여분으로 구입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탁구라켓은 오래 써야 1년이다. 소연이는 지난 1일 코치로부터 운동복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소연이 후원 계좌 기업은행 154-039430-01-089 예금주 : 남산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