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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땐 미군이 폭파…61년뒤 붕괴 '비운의 왜관철교'

장맛비와 낙동강 살리기 준설로 무너져 내린 경북 칠곡군
장맛비와 낙동강 살리기 준설로 무너져 내린 경북 칠곡군 '호국의 다리'(구 왜관철교) 주변에 다리 보강공사 자재인 '쇄골'이 물속에 잠겨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한국전쟁이 터지고 40여일 만인 1950년 8월 3일 오후 8시 30분 왜관철교가 미군에 의해 폭파된 이후 61년 만인 25일 새벽 4시10분쯤 또다시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6'25가 발발한 시간과도 거의 똑같아 다시 한 번 왜관철교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이 다리는 일제가 1905년 군용 단선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교. 1941년 11월 이곳에서 북쪽 100m 지점에 복선철교 가설로 인해 경부선 국도로 바뀌었다. 1970년 11월 왜관교 가설로 지금까지 인도교로 활용되고 있다. 또 2008년 등록문화재로 선정됨과 동시에 이제는 '호국의 다리'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호국의 다리는 왜관을 비롯한 칠곡주민들에게 100년이 넘도록 '다리' 역할을 맡는 등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고,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다리여서 이번 붕괴로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6.25 당시 왜관에서 현풍까지 약 40km구간을 방어하고 있던 미 1기병사단 게이 사단장은 김천에서 왜관으로 부대를 철수하면서 한강철교와 버금가는 전략적인 가치를 지닌 왜관철교를 폭파한다는 계획을 미리 짜놓고 있었다.

하지만 김천과 왜관을 잇는 국도 4호선을 따라 몰려온 수많은 피란민들이 이곳 다리를 통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왜관으로 밀려들고 있어 철교의 폭파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총을 통한 위협도 통하지 않는 피란민들을 두고 다리를 폭파하는 것은 당시 게이 사단장의 가장 큰 고심의 순간이었다.

게이 사단장은 결국 8월 3일 저녁 고심 끝에 철교 폭파를 지시했다. 이로써 길이 469m, 폭 4.5m의 다리는 왜관쪽 두번째 교각과 세번째 교각 사이 63m가 끊어지게 된다. 이번에 붕괴된 호국의 다리 약목쪽 두번째 교각과는 반대쪽이다.

피란민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가져온 짐들을 버리기도 했고, 밤중에 어린아이 손을 잡고 강을 건너다가 놓쳐버리거나 등에 업은 아이가 익사하는 등 참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왜관철교를 폭파한 미1기병사단은 8월 4일 오전까지 강 동쪽 연안에 진지 구축을 완료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모래가마니를 강바닥에 깔고 도하를 시도하던 적을 포격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결국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왜관철교를 인위적으로 폭파시키는 등 피비린내 나는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을 물리침에 따라 대한민국을 구하게 된 것이다. 왜관철교는 그만큼 우리나라 한국전쟁 역사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칠곡'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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