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을 하는 박성호(45) 씨는 최근 우편으로 책 한 권을 받았다. 사업상 알고 지내던 사람이 보낸 자서전이었다. 자서전을 펼쳐 보니 온통 개인적인 에피소드뿐이었다. 박 씨는 "잊지 않고 책을 보내준 것에는 감사하지만 솔직히 자서전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자서전을 통해 뭔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지 않아서다. 자서전 내용도 교훈을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자서전 출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자서전을 유명인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자서전을 많이 펴내고 있다. 사회도 자서전 출간을 부추기는 분위기다. 자서전 쓰는 법을 가르치거나 아예 대필을 해주는 곳이 성업 중이다. 자서전 열풍이 불면서 시중에 자서전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읽고 교훈을 얻을 만한 자서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국의 자서전 문화를 들여다봤다.
◆자서전 출간 봇물
자서전 출간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28일 이상의 전 합참의장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자서전 '세레노 리더' 출판기념회를 가진 데 이어 29일에는 국내 여자 프로복싱 간판 스타 김주희 씨가 자전적 에세이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를 출간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14일에는 배구한 경남안경사회 회장의 자서전 '봉사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5월 24일에는 하임조 김포 우주산업 회장의 자서전 '인생은 연습이 없다', 5월 18일에는 노르웨이 라면시장의 95%를 장악한 라면왕 이철호 씨의 자서전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마', 4월 22일에는 '고향역'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등을 작곡한 임종수씨의 자서전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가 출간됐다.
내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자서전 출간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전원석 민주당 부대변인은 이달 4일 자전적 에세이 '나의 꿈 나의 도전'을 펴냈다. 여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분류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최근 자서전 '김문수 스토리 靑'을 출간했다. 김 지사의 자서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푸른 색으로 크게 쓰인 '靑'(청)자였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연상시킨다. 대권 의지를 중의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대권도전 의사를 밝힌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도 지난달 12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자서전 '김정길의 희망'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또 야권의 숨은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지난달 15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 참여정부 5년의 기록과 비화 등을 담은 '문재인의 운명'을 펴냈다.
◆자서전을 쓰는 이유
자서전은 개인의 인생을 솔직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개인의 인생이 소재로 사용되다 보니 자서전을 쓰는 이유도 개인마다 다르다. 자서전을 출간하는 가장 흔한 이유로는 인지도 향상이 꼽힌다. 굵직한 정치 일정을 앞두고 정치권 인사들이 경쟁하듯 자서전을 펴내는 것도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자서전을 출간한 사례도 있다. 이철호 씨의 자서전은 기자 출신인 딸 이리나 리가 썼다. 그녀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한국서 태어나 6'25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노르웨이로 와서 성공한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내 아이들도 커서 할아버지 스토리를 알았으면 해서 자서전을 썼다"고 말했다.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서전을 출간하는 경우도 있다. 김주희 씨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상처입고 다치더라도 그 아픔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걸고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며 자서전 출간 이유를 밝혔다.
폭로형 자서전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학력위조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 씨가 올 3월 펴낸 자서전 '4001'이다. '4001'은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바로 자서전에 담긴 내용 때문이었다. 신 씨는 자서전을 통해 학력위조에 대한 해명과 함께 유명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부적절한 처신을 주장, 진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자기고백이 아닌 복수심 때문에 자서전을 출간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신 씨는 "세상이 내게 찍은 거짓말쟁이와 꽃뱀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책을 썼다. 남의 도덕심에 대해 무슨 비판을 하려고 책을 쓴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올 4월에는 '스폰서 검사' 의혹을 폭로한 정용재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자서전 성격의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이 출간돼 파문을 일으켰다. 저자는 "책을 발간해 스폰서 검사 전원을 시민법정에 세우고 싶다. 독자가 배심원이 되어 엄정한 판결을 내려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자서전이 외면받는 이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식탁에 마주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실려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지금도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고금의 진리처럼 살아 있다. 또 미국 헌법의 기틀을 다진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미국 젊은이들의 인생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서전 수입으로 한 해 수백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서양에서 자서전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문학장르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 출판시장에서 자서전은 장사가 안 되는 아이템 중 하나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자서전이 대접을 못 받고 있을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자서전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종홍 영남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자서전은 개인사를 솔직담백하게 기록한 것이다. 정치적'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생을 미화하고 과장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자서전 토양이 황폐화됐다. 대필을 많이 하는 관행도 자서전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일조했다. 자서전이 국민적 신뢰를 잃으니 자연스럽게 건전한 자서전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해 귀감이 되는 자서전도 찾기가 힘들어졌다. 또 타인의 삶을 포용하고 인정해주기보다 배척하려는 경향도 자서전 문화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상엽 교보문고 대구점 매니저는 "자서전이 남발되면서 자서전에 대한 가치가 떨어졌다. 사회 지도층 인사에 대한 불신도 한몫을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지도층 인사가 적다 보니 그들이 펴내는 자서전 또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정치인의 자서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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