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서적을 별로 읽지 않는 시대에도 불침번처럼 깨어서 시대를 증언하고 삶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작가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삶과 역사에 대한 통찰을 포기한 채 일상에 파묻혀 허우적대다 죽어갈지 모른다.
대하소설 '국경'과 청소년 소설인 '골목이여, 안녕''모래도시의 비밀' 등을 쓴 작가 김남일의 '천재토끼 차상문'을 읽었다. 이 책은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토끼로 태어난 한 인간의 이야기다.
때는 1950년대 중후반. 차진수는 경찰 대공 수사관으로, 좌익 지식인 유진명을 쫓던 중 그의 여동생인 시골 초등학교 교사 유진숙을 강간하여 임신시킨다. 유진숙은 출산이 가까워져 오자 스스로 집을 나와 헤매다가 차상문을 낳는다. 그런데 그 아이는 갓 쪄낸 백설기처럼 새하얀 토끼 한 마리였다.
천하에 없던 괴이한 생명체 토끼 영장류로 태어난 차상문의 일생이 험난할 것은 미리 예정된 일이었다. 여자는 끔찍하게 잊고 싶을 그 사내와 할 수 없이 살림을 차리지만, 그 무렵 조직에서 밀려나 외항선을 타기 시작한 차진수는 집에 들를 때마다 거친 말과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국가폭력, 가부장제 폭력의 전형이랄 수 있는 차진수. 게다가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다. 곱고 여렸던 유진숙은 마침내 정신을 놓아버린 채 남은 생을 허깨비처럼 살게 된다.
토끼의 동생 차상무도 태어났는데, 그는 다행히 토끼는 아니었으나 아비의 성정을 닮아 아비와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이야기는 퍼즐처럼 이어진다.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그러모아 그들이 각각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가면서 책을 읽게 된다.
차상문은 천재였다. 특히 수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다. 월반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버클리대학에서 수학한다. 그 과정에서 1970년대 미국 베트남전 반대 시위와 히피들이 등장하며, 차상문은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열심인 한 여자토끼도 만난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강렬한 연애감정에 사로잡히지만, 여자토끼가 북조선 출신인 것을 알자 스스로 그 여자토끼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한다.
차상문은 버클리대학 수학과 최연소 교수가 되지만 몬태나 깊은 숲속의 은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홀연 교수직을 그만둔 채 몬타나 숲으로 은자를 찾아가 영적 스승으로 삼게 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은자는 훗날 산업혁명 전체와 맞서 홀로 '전쟁'을 시작한 유나바버였다. 차상문은 그와의 교류를 통해 인간 영장류가 끌고 온 문명의 역사에 대해 '근본적인 동시에 급진적인' 인식을 굳히게 된다.
귀국 후 차상문은 서울의 국립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한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그는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지식인인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다. 그는 제자가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죽음을 맞게 되자 교수직을 사퇴한다. 그후 그의 삶은 다양한 모색과 방황으로 이어지지만 답을 찾지 못하는데. 차상문은 걸을 때 제발 "쿵쿵거리지 말아 달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직립보행, 나아가 인류의 존재 이유와 존재 방식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요구가 인간 영장류에게 먹혀들 리 있을까.
차상문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정관수술을 받고 그 스스로 '장엄한 전쟁'이라 칭한 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시도한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던 초등학교 뒷산 동굴을 절멸의 장소로 선택한다. 벽돌이 하나둘 쌓이고, 마침내 마지막 햇살마저 사라진다.
좌(左)와 우(右)의 폭력적 결합을 통해 태어난 토끼 차상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인간의 존재 이유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기발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무섭고 슬프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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