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경북 누에 100년

기원전부터 중국과 로마를 이은 비단길(Silk Road)과 관련, 흥미로운 점이 있다.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흐토펜(1833~1905)이 그린 세계지도가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지도 위에 비단길을 그려넣었다. 이 지도는 비단의 전 세계 전파 경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이 비단길의 출발점은 한반도(Corea)다. 왜 한반도를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자못 궁금하다.

혹 그가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820~912)가 남긴 "중국 동해의 이 나라(신라)로부터 가져오는 물품은 주단(綢緞'질 좋은 비단), 도기 등이었다"는 글을 봤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신라 비단은 해외로 수출될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일본에선 미리 신청해야 했다. 일본에 현존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란 주문서가 그 증거다. 또 신라 무덤에서 발굴된 천 조각의 분석 결과, 수백 년 뒤 조선 때보다 질이 뛰어났던 것으로 판명됐다. 어쩌면 신라 비단이 나라 밖 멀리까지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단(silk)을 준 누에(silkworm) 기르기 즉 양잠의 역사는 오래다. 중국이 발상지로 알려진 양잠을 우린 단군 때부터 시작했다. 양잠은 늘 농정의 핵심이었다. 왕이 직접 나서 기르는 친잠(親蠶)을 한 까닭이다. 신라 비단이 말해주듯 한반도에선 경북이 양잠의 최적지였다. 기상과 온도 변화에 민감한 누에는 자연적인 조건이 중요하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경북은 누에 먹이인 뽕나무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은 일제였다. 1910년 나라를 삼킨 일제는 철저한 조사 뒤 양잠 적임지를 골라 생산에 열을 올렸다. 양잠은 쌀과 면화, 축우와 함께 일제의 4대 농업 작목에 포함될 정도였다. 또한 도(道) 단위로는 처음 경북의 대구에 관립 잠업강습소를 1911년 설립했다. 수탈의 근대 경북 양잠 100년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경북 누에는 전국 총 생산량의 20%에 이를 만큼 최고였다.

그러나 광복과 산업화 이후 양잠은 시들했다. 그런 양잠이 최근 의약 분야, 신소재 개발 등 바이오산업으로 발전 가능성을 보이면서 다시 뜨고 있다. 경북 위상은 여전히 전국 1위다. 경북도가 최근 경북 누에 100년의 역사를 담은 '경북 잠업 100년사'를 펴냈다. 경북 누에 100년사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경북 누에가 신라 비단처럼 다시 한번 세계를 누비며 옛 영광을 재현하길 빌어본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