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삶의 속도를 늦추자

우리는 도시철도역 에스컬레이터에서, 대형마트나 공항의 무빙워크에서 바쁘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본다. 사람들은 왜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을까? 에스컬레이터는 움직이는 계단으로 걷는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든 도구인데도 말이다. 일본의 한 조사에 따르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걷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오사카에서는 35%, 도쿄의 경우 25.5%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조사를 했다면 결과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세계 32개 도시를 대상으로 한 걸음 속도 연구(2007년)는 시사점이 많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진행한 연구였는데, 현대인의 걸음 속도가 10년 전보다 10% 빨라졌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아시아 사람들의 속도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싱가포르는 30%, 중국 광저우는 20% 정도 빨라졌다. 도시별로 18m(60피트)를 걷는 속도(단위:초)를 보면, 싱가포르가 10.55로 가장 빠르게 걸었다. 다음은 ▷코펜하겐(10.82) ▷마드리드(10.89) ▷광저우(10.94) 등의 순이었다. 가장 느린 곳은 31.60을 기록한 말라위의 블랜타이어였다. 연구팀은 걸음 속도가 빨라진 데 대해 스트레스와 업무 중압감이 커져 마음이 바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휴대전화, 이메일 등의 이용 증가가 매 순간 무엇인가를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을 일으키고, 이것이 걸음 속도에 영향을 끼친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도시는 이 연구에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조사 대상이 됐다면 그 결과 역시 불문가지다.

우연히 주차장에 대기 중인 전세버스들을 봤다. 버스에는 소속사 이름이 표기돼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고속관광' '××고속관광' 등 '고속'이란 글자가 빠지지 않았다. 관광도 '고속'으로 시켜준다는 의미인가? 아이러니하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갖고 풍광을 즐기자는 관광마저 쫓기듯 '고속'으로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이 느껴진다.

속도에 대한 숭배 내지 강박은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퀵서비스' 'LTE망 속도 전쟁' '신속 배달' '선착순 판매, 선착순 모집' '1주일 내 ○○㎏ 감량' '1개월 공부, 90점 이상 보장', 심지어 짧은 시간에 수술이나 시술을 할 수 있다는 '퀵 성형' 등은 속도전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현 정부 들어서 신문과 방송을 통해 속도전이란 말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4대강 사업에서 그랬고, 각종 예산안과 미디어법 통과 등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소형위성 발사체 나로호(KSLV-1)의 두 차례 발사 실패, KTX 산천의 잦은 고장 등도 조급증과 성과주의의 부산물이다.

속도전은 성과주의, 무한경쟁시대, 고도성장시대의 아이콘이다. 속도를 낸다는 것은 압축적이며 돌진적이다. 압축적'돌진적 발전 모델은 가장 빨리 이익이 기대되는 곳에 인풋(input)을 극대화해 승부를 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산업화를 앞당겼고('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름), IT 강국으로 우뚝 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속도전은 자원 배분의 불균등, 서울과 지방의 불균형, 소득 양극화 심화, 승자독식, 성적지상주의 등 여러 사회문제와 갈등을 낳는 원인이 됐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속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속도와 성과에 매몰되면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게 되고, 인간성마저 상실할지 모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빨리 출세해야 하고, 한눈팔면 누군가 코 베어 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 함께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 거리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손 내밀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도로에는 깃발 꽂은 오토바이들이 피자나 치킨을 1분이라도 빨리 배달하기 위해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피자를 조금 빨리 먹기 위해 꽃다운 청년들의 목숨을 외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 다행히 걷기와 슬로푸드 등을 통해 느림에 대한 욕구와 성찰이 문화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속도'란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89년 11월 프랑스에서 채택된 슬로푸드 선언문 중 한 문장은 죽비 같다. "생산성 향상의 이름으로, 빠른 생활이 우리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환경과 자원을 파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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