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해를 보내고 맞으면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안부전화였습니다. 이른 봄이면 야전부대의 대대장으로 나간다는 소식에 얼마나 반갑던지요. 동료들에 비하여 진급 진출이 조금 늦은 제자였기에 내 맘 한 켠에 늘 기원의 추가 드리워져있었는데 기쁘고도 미더웠습니다.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던 중 대대장 선물로 무얼 줄까 하고 넌지시 물었더니 "교수님, 꼭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며 단소를 하나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잊지 않으셨지요? 대대장 나가면 단소로 지휘봉을 하라고 하시던 말씀을요"하며 단단히 쐐기를 박더군요.
순간, 젊은 날 열정을 쏟아냈던 교정이 뇌리를 스칩니다. 영관장교 시절 국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나는 사관생도의 절도 있는 태도와 국악의 격조를 접목시키고 싶었습니다. 20수년 전만 하여도 군 교육과정에 국악프로그램은 생경스러웠고 오히려 거부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정악(正樂)은 더욱 낯선 대상이었고요, 거문고나 대금의 소리를 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요. 또한 긴 호흡의 시조창이나 가곡을 시연하자면 정말 많은 연습이 필요치 않습니까.
결국 육군3사관학교에 국악부(정악)를 출범시키고 전용 연습실까지 한 칸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행정학을 전공한 나는 의욕만 넘치는 지도교수였지 국악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나는 궁리 끝에 직공법을 썼지요. 인접의 국립대학 국악과로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젊은 장교단이 정대(正大)한 우리음악을 공부해야 하니 도와달라고 했지요. 나의 확고한 태도에 국악과의 주임교수였던 초로의 ㄱ교수는 코믹한 손짓으로 거수 경례를 붙이면서 "OK!" 하고 구호로 대신하던 광경이 훈훈하게 떠오릅니다. 호쾌한 그분은 알고 보니 거문고 연주의 명인이요 우리나라 국악계의 거장이었습니다.
그 후 매주 4시간 수준의 국악교육이 진행되면서 꾸준한 연습의 결과로 생도들은 어설프나마 거문고를 연주하게 되고 대금과 단소도 불게 되었으며 낭랑한 시조창을 읊조리게도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단소는 공통으로 다루는 악기였지요. 그때 앳된 국악부 생도였던 그 제자가 이제 중령으로 진급한 것입니다.
그 시절 나는 국악부 생도들에게 훗날 지휘관이 되거든 단소를 다만 악기로만 보지 말고 지휘봉으로 쓰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훈련에 지친 병사들에게 지휘봉으로 사용하던 단소를 폼 나게 연주하는 멋진 지휘관이 되라고 했지요. 땀 흘린 훈련장에서 들려주는 지휘관의 단소연주는 신선한 피로회복제가 될 것으로 믿은 것이지요. 명품 휴식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지휘봉을 선물하는 것은 군대문화의 하나입니다. 고급 지휘관으로 취임할 때면 상급자나 주변의 동료들이 무운을 기원하는 선물을 나눕니다. 대대장은 600여 명의 휘하 장병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 예하의 개별 병사 집단과 가장 거리감이 없는 밀착된 지휘관이지요. 진정 축하할 일입니다.
나는 내가 아끼던 대나무 단소 하나를 꺼냈습니다. 흥에 겨워 소리를 내봅니다. 맑고 실한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처럼 그의 부대가 올곧고 전투력이 출중한 부대가 되라는 기운을 가득 담습니다. 아울러 책임지고 다듬어 나갈 병촌에 멋진 한 가락의 단소를 불러줄 제자의 멋스러운 모습을 기분 좋게 떠올려 봅니다. 겉멋, 가끔은 필요하잖아요.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으로 내비치는 종래의 지휘봉을 대신하여 소리(樂)로 부대를 경영하는 멋진 지휘봉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전 예기(禮記)에 보면 악은 민의 소리를 조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음악은 조직을 협력적으로 아우르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명지휘관이란 곧 부대원 개인의 역량을 조직 전체의 에너지로 이끌어내는 리더십에 달려있는 듯 합니다.
느리지만 그 소리가 걸림이 없어 웅혼한 우리의 정가, 이미 세계인들의 문화유산이 된 그 정가곡들이 병영에도 울려 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치유의 미학으로 거듭 나면 더욱 좋겠지요. 단소 지휘봉이 조화의 향도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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