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는 붉은색을 좋아한다. 투우사에 맞서는 싸움소와 비슷하다. 스페인 투우장의 싸움소들은 주연 투우사인 마타도르가 흔드는 붉은 보자기인 물레타를 향해 돌진한다. 그 보자기 속에는 목을 찔러 심장을 관통하는 검이 감춰져 있지만 소는 강인한 뿔로 투우사를 들이받으면 능히 이길 줄 알고 덤벼든다.
문어도 그렇다. 낚시꾼이 던져둔 붉은색 폴리에틸렌 플라스틱 통 안으로 사정없이 기어들어간다. 옛날에는 붉은색을 칠한 낚시 항아리를 던져두면 문어들은 그걸 자기 집으로 삼았다. 투우장의 싸움소가 그렇듯 문어도 붉은 유혹이 자신의 죽음인 줄을 모른다. 투우는 색맹이어서 붉은색을 선호할 이유가 없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싸움소와 문어는 적호동족(赤好同族)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하는 인간 중에는 빨간색(좌경)과 검은돈(뇌물)을 동시에 좋아하는 족속들이 많아 바야흐로 '적과 흑의 블루스'가 밤하늘에 메아리치고 있다.
투우의 상식을 위해 잠시 엇길로 가보자. 스페인 바르셀로나 투우장의 경우 시작 나팔이 울리면 주연 및 보조 투우사들이 말도 타고 걷기도 하며 투우장 한 바퀴를 행진한다. 이어 보조 투우사인 불루라델로 2, 3명이 카포테란 붉은 천으로 소를 흥분시키고는 퇴장한다. 다시 말을 탄 보조 투우사 파카도르가 등과 목에 창을 찔러 기운을 뺀 다음 반데리예로라는 보조 투우사 2명이 6개의 작살을 꽂는다. 원한에 사무친 소는 가장 늦게 등장하는 주연 투우사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간혹 투우사가 소뿔에 찔려 죽기도 하지만 대부분 투우장에서 싸우다가 죽도록 운명 지어진 싸움소는 관중이 투우사에게 보내는 환호와 갈채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최후를 맞는다.
엇길에서 돌아왔다. 나는 젊은 한 때 바다낚시 중에서도 도다리 낚시에 미친 적이 있었다. 도다리 낚시는 큰 기술이 필요 없는 '무대뽀' 낚시지만 그렇다고 기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서너 명이 타는 낚싯배를 타고 동트기 전에 바다 한가운데 정치망 쳐둔 곳에 도착한다. 목줄을 정치망 고정밧줄에 묶고 낚시 채비를 내리면 심심찮게 도다리란 놈이 올라온다.
큰놈 작은놈 할 것 없이 위계질서를 무시한 채 미끼를 먹으려다 걸려든다. 운 좋은 날은 덩치가 큰 점도다리도 너댓 마리 잡히지만 낚시꾼들이 소원하는 것은 바로 문어다. 문어가 물리면 끌어올리는 힘이 약한 스핀너 릴로는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묵직하다. 그럴 때는 낚싯대를 놓고 맨손으로 낚싯줄을 잡고 걷어 올려야 한다. 마치 큼직한 걸레뭉치가 딸려오는 느낌이다. 도다리 낚시를 하다 문어 한 마리를 건져 올리면 바로 횡재나 다름없다.
도다리 낚시를 할 땐 올라오는 잔챙이들은 쿨러에 넣지 않고 선장 앞으로 던져 버린다. 선장은 잡힌 도다리가 어느 정도 양이 되면 뭉당칼로 회를 친다. 도다리의 웃 껍질만 벗겨 내고 뱃가죽과 '날감지'(지느러미)채로 뭉텅뭉텅 썬다. 이른바 '새코시'라는 뼈째 썬 생선회의 원형인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여태까지 먹어 본 회 중에서 베스트를 뽑으라면 낚싯배 위에서 먹는 '뭉텅회' 바로 그것이다. 코펠에 불룩하도록 썬 횟감 위에 준비해간 초고추장을 그대로 부어 버리면 미처 나무젓가락을 챙기지 못한 친구는 인도가 고향인 듯 맨손체조를 한다. 소주는 금방 동이 나버린다.
낚싯배에서 문어 한 마리를 잡고 나면 더 이상 낚시를 하기가 싫어진다. 빨리 갯가로 돌아가 불을 피우고 잡은 문어를 구워 먹고 싶어서다. 문어 구이는 별도의 레시피가 필요 없다. 문어 대가리 속의 먹통을 따내고 씻을 필요도 없이 모닥불 속에 던져두기만 하면 된다. '재는 나랏님도 먹는다'는 말이 있다. 불 속에서 굽혀 나온 문어는 타월이나 고기포대 등으로 쓰윽 한 번 문지르면서 훑어내면 속살이 나오기도 하고 껍질이 붙어 있기도 하다. 문어는 살이 너무 익어 못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주를 병째 들고 낚시 칼로 다리 하나씩을 잘라 씹어 먹으면 정말 쫀득하면서 고소한 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맛이 있다. 안 먹어 본 사람은 이 맛을 모른다.
이왕 문어 얘기가 나왔으니 집에서 문어 삶는 법을 소개할까 한다. 옛날에는 살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식초와 설탕을 조금씩 넣어 삶아내는가 하면 지중해 쪽에선 화이트 와인 코르크를 두어 개 넣어 삶기도 했다. 모두 필요 없는 짓이다.
빈 솥이나 냄비를 불에 얹고 약간 달아오를 무렵 물에 헹군 문어를 넣고 살 색깔이 붉어질 때쯤 불을 끄면 된다. 굽는 것 반, 삶는 것 반의 아주 맞춤한 요리가 된다. 붉은 고장에서 태어나 붉은색으로 돌아간다. 문어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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