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1부>새로운 출발 ⑤산을 멀리하라?

등산 아니면 TV인가… 은둔은 나를 더 늙게 한다

그림:화가 이도현
그림:화가 이도현

'대한민국 산에는 개미보다 등산객이 더 많다.'

정년이 없는 미국이나 어른의 경험을 중시하는 일본과 달리, 은퇴하면 그냥 퇴물 취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등산으로 세월을 죽이는 은퇴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우스갯소리다.

등산은 은퇴자들에게 큰돈 들이지 않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최고의 여가활동이다. 하지만 '30~40년을 산에만 다닌다면 과연 행복할까'라고 묻는다면 즉각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우재룡 삼성생명은퇴연구소 소장은"자신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여가를 개척하는 것이 좋다. 이런 점에서 등산과 여행 같은 여가는 자신의 영혼을 담기엔 조금 가볍다. 악기를 연주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과 악단을 만들어 요양원을 다니면서 봉사하는 것은 권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은퇴자들은 온종일 TV 앞에 있거나 온종일 등산한다"며 TV를 꺼야 하고 등산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잠깐 즐기는 가벼운 여가보다는 어렵지만, 난관을 극복해가며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여가를 고르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날마다 일요일인 은퇴자들

여가는 크게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와 캐주얼한 여가(Casual Leisure)로 나눌 수 있다. 캐주얼한 여가는 짧은 즐거움을 주며 등산, 골프, 여행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진지한 레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장기적인 경력을 쌓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등산과 같은 캐주얼한 여가는 성취감을 주거나 사회적 교류를 확대시키고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가벼운 여가보다는 진지한 여가를 권한다.

30년 이상 등산을 하는 김성학(62) 씨는 "노년에 건강을 지키며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등산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지만, 평일 산을 오르는 40, 50대를 보면 산 보다는 세상 속에서 성취감을 맛보는 파이터의 기질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노후의 여가활동은 지나치게 한 분야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시간과 노력을 골고루 배분하는 것이 좋으며, 세상과 교류하고 자기 계발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여가를 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새로운 만남을 찾아라.

사실 한국의 은퇴자들에게는 딱히 여가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다.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 인구 5명 중 3명이 '여가 및 사회활동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응답자 중 최근 1년 동안 가장 즐거웠던 여가활동으로 꼽은 것도 ▷가족과 보낸 시간(52.3%) ▷친지와 회식 (18.5%) ▷TV시청 및 독서(10.5%)였다.

어쩌다 가족 친지들과 어울리는 경우를 빼면 여가를 즐긴다 해도 대부분 '나 홀로 여가'다. 그것마저도 소극적이며 단조롭다. 최무천 노인생애설계 전문가는 "은퇴를 하고 나면 남자들의 사교성은 여자들보다 오히려 떨어진다. 수직적 관계에 익숙해져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이 힘들고 아집과 고집이 세져 고립과 은둔을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등산도 혼자 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시니어들이 사회관계를 맺는 사람의 수는 8.7명이었으나 이것도 대부분 친척이나 자녀였다. 은퇴 후 새로운 사람과의 접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영애 (사)한국노후 생애설계협회이사는 "여가활동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것보다는 신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 혼자 하는 활동과 여럿이 함께하는 활동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가령 등산을 해도 여럿이 함께 쓰레기를 줍는 등 환경보호활동을 하는 것은 권할 만하다고 했다.

바이올린을 배운 후 봉사연주를 활발히 하고 있는 백만기(61) 씨. 그는 "혼자 등산할 때는 가끔 지루하다거나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을 느꼈지만, 바이올린을 배운 이후부터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대화거리도 풍성하고 더 재미있다"고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 또 다른 도전거리가 이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제 그림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75세 할머니가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 55세 연하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도전하는 은퇴자들이 많았으면 한다. 그런데 한국의 산들이 은퇴자로 채워지고 있는 한 그것은 요원할 것만 같다. 너무 비관적인가?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화가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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