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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 광장] '말 잘 들어라' 경청과 명령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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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래이."

"오냐, 그래,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그래이."

이번 설에도 어김없이 어른들이 해주던 '덕담'이었다. 공부하라는 당부에서 '열심히'와 '잘'이라는 부사만 다르게 썼을 뿐, 맨 처음 나오는 말씀은 "말 잘 듣고"였다. 내 어릴 적 듣던 덕담은 "그래, 올해도 건강했다지?" 뭐, 이런 말씀이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었다. 어릴 적 어느 설날, "왜 과거형이에요?"라는 나의 물음에 아버지께서는 "덕담은 과거형으로 하는 거야.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강렬한 바람을 담는 거지"라고 말씀하셨다. 난 어린 나이에도, '아하, 그렇구나. 진짜 멋있다'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요즘처럼 어른이 아이에게 명령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비록 부드럽게 바람을 담는다고는 하나), 아예 과거형으로 시제를 확 바꾸어서 '네가 이미 이루어냈구나'하는 자신감마저 불어넣다니!

3월, 올해엔 유독 내 주변에 새로 입학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특별히 초등학생이 되는 아이들에게 선물과 함께, 짧지만 가슴에 오래 남는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거의 자동으로 떠오르는 말이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래이'였다. 어이쿠야! 0.1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떠올린 말은 '너 자신이 되거라'였지만. 사실 진심으로 해 주고픈 말은 후자였다. 그러나, 이제 8살인 아이들에게 하자니 이해할까 싶어 저어되었다.

말 잘 들으라니! 누구 말을, 왜, 뭐 어떻게 잘 들으라는 걸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이럴 때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주체는 자식, 학생, 아이들이다. 왜 잘 들어야 하는 걸까? 다 듣는 너희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기 때문이란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란다. 선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리 얘기도 좀 들어주세요", "이제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여…" 수직적 관계로 볼 수 있는 두 경우 모두에서, '말을 잘 듣다'라는 말은 상당히 달리 쓰인다. '듣다'라는 같은 동사이지만, 매우 다른 의미로 쓰인다. 전자는 '(말, 말씀 따위를 목적어로 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다'에 해당하고, 후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다'에 해당한다. 전자가 명령, 복종, 규범 준수 등의 관계라면, 후자는 경청과 공감의 관계이다.

지난해 둘째 아이의 중학교 교장 선생님과 3시간여에 걸친 면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교장선생님이 "애들이 말을 얼마나 안 듣는다고요", "애들이 말을 들어야지요"라고 하셨다. 그런데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그 아이들이 가장 속상해하고 바라는 것은 "선생님들이 우리 말을 안 들어주셔요. 그냥 우리 얘기를 그대로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였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바란 것은 말하는 대로 따르는 명령-복종의 '듣다'였고, 학생들은,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경청-공감의 '듣다'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대체로 부모는, 학교는, 사회는 말 잘 듣는 착하고 규범적 아이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가 상상력이 뛰어난 창조적인 아이, 공감하는 아이, 리더십(지도력)이 뛰어난 아이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규범적일수록 창조성은 사라진다. 상상력은 '지금 가능해보이지 않는 것', '원래 그렇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것'에서 벗어날 때 피어나기 때문이다.

공감을 잘 하려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경청) 한다. 리더십이라고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잘 따르게 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리더십의 토대는 공감과 경청이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권력자일수록, 리더일수록 타인의 말에 스스로 귀 기울여야 한다. '내가 선의를 가지고 일 좀 잘 해보려 하는데, 말을 안 들어준다고' 화를 낼 게 아니라, 왜 나의 선의가 안 받아들여질까 자문해보고 선의를 받으라고 강제했던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보시라.

그나저나 이제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 열심히 잘 들어보그래이" 이러면 될라나.

김성아/(사)더나은세상을위한공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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