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신중현 '봄비'

한 사람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며칠 전 늦은 밤, 대구 인근의 소도시에서 조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녀를 떠올렸다. 짙은 어둠이 깔린 그 길이었다. 이십여 년 전, 그녀가 삶의 끝자락을 껴안고 힘겹게 걸어오던 그 길이었다. 그녀가 뛰어내린 다리 옆으로 세월에 녹슨 철책이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그녀의 이름 앞에 위장취업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탓이었을까? 그녀의 주검이 안치된 병원에는 지인들의 조문객들보다도 많은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일을 했던 동료들에게 그녀의 죽음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명문대학의 인기학과를 버리고 그녀가 노동자의 삶을 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0여 년을 누구보다 열심히 노동자로 살았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깊은 연민을 가졌던 그녀였다. 노동자로 사는 것이 너무도 당당했던 그녀의 죽음은 사람들의 많은 억측을 낳았다. 어떤 이는 그녀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실연의 고통에 시달렸노라고 말했다. 경찰의 입회 아래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의사는 아무런 감정 없이 자살의 증거를 이야기했고 그저 서러운 오열만이 부검실 공간에 가득했다. 다음 날, 서둘러 화장이 이루어졌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를 잊어갔다.

그리고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그녀가 기억의 저편에서 다가왔다. 늦은 야근을 마치고 그녀가 걸어온 길 사이로 큰 소리를 내며 차들이 지나간다. 그녀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폭력이 난무하던 야만의 1980년대를 거쳐 오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 어쩌면 90년대는 희망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을까?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 우리가 지켜왔던 많은 것들이 일거에 무너지던 시간이 그녀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그녀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친구들의 질시와 반목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랬다. 절망을 빗대 세상을 조롱하면서 그저 승리한 체제를 향해 발길을 돌리거나 서로의 길이 틀렸노라고 소리쳤다. 그런 동료들에게서 그녀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녀가 적어도 고민에 빠져 힘들고 아파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더라면 그녀가 그 희미한 가로등 길을 울며 걷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혼란을 핑계로 스스로를 돌보기에 급급했고 나의 동료가, 나의 가족이 무엇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지를 돌아보지 않았다.

몇 년 전 인도의 라다크로 가는 외진 길에서 수백 마리의 양떼를 만났다. 버스는 길 한쪽으로 비켜섰고 승객들은 내려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길 아래로 수천 길의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순간, 여기서 한 발을 내딛는다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깃털처럼 가벼운 몸으로 저 아래 강물에 닿을 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까? 바스러진 돌들이 아득히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몸을 떨었다. 양들의 울음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어미를 잃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 양의 소리였다. 늙은 양치기가 새끼 양을 안았다. 그리고 무리로 집어넣었다. 결국 살아남은 자의 변명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이슬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신중현 '봄비')

과거는 늘 후회로 가득하고 현실은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선한 마음만으로는 이 세상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가슴에 품었던 세상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기억 앞에서 또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과 후회로 살아갈 것인가? 어둠 속에서 차들이 속력을 내며 달려오고 있다. 얼핏 전조등 사이로 빗방울이 긋는다. '위험' 그녀를 기억하는 낡은 표지가 철책 위에서 나부낀다. 봄비가 내린다.

전태흥 미래TNC 대표사원 62guev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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