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옷보다 못이 많았다

# 옷보다 못이 많았다 -박준(1983~ )

그해 윤달에는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가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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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윤달이 없다. 수의를 지어 파는 가게는 매출이 뚝 떨어질 것이다. 이삿짐센터는 점쟁이들이 시키는 날짜에 목을 맬 것이다. 반면 부적을 그려 파는 집은 물감을 더 써야 할 것이고, 결혼식장은 연중무휴 웨딩마치를 울리며 신나 할 것이다.

벽에 못이 많다는 것은 옷장이 변변찮다는 이야기다. 살 형편이 못 되거나 있어도 놓을 자리가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옷보다 못이 많다니. 서러운 살림살이다. 신들도 자리를 비켜준다는 윤달에 이사를 하는 성의를 보이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는다. 해코지를 하지 않는 신이지 살림에 도움 되는 신은 결코 아니다. 발을 다치고 먹은 게 체한다. 신산한 삶이 엄중하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이다. 삶의 누항, 낡은 골목에 앉아 한 백년은 사람살이를 지켜본 듯 은근한 시선이 도처에 수굿하다. 이름만 지어다가 아픔을 달랠 수밖에 없는, 그 이름의 주인들이 사라진 세상의 덧없음을 혹독하게 앓으며 낮은 신음으로 버티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신음은 때로 꽃잎이 나부끼는 봄날의 어떤 허밍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지녔다. 지켜본다.

안상학<시인·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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