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배려 바이러스

비가 촉촉이 내린 다음 날 산을 올랐다. 경북도청 뒤편 연암공원 야산이다. 봄 냄새 풍기는 풀들이 푸른빛을 뿜어냈다. 신발끈을 동여매고, 바짓단을 양말 속으로 집어넣었다. 물기 머금은 흙에 바지가 더럽혀질까 걱정됐다. 점심식사 후 산을 오른 지 6개월여 만에 허리띠 한 칸을 줄였다. 말이 산이지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잰걸음으로 20분. 도청에서 연암공원까지 5분. 하루 30분의 산책을 통해 건강도 챙기고 생활에 활력소도 얻는다.

금호강이 신천을 보듬는 부드러운 물결, 경부고속도로 북대구 IC를 드나드는 차량, 엑스코를 중심으로 잘 짜인 종합유통단지를 조망하며 발길을 옮겼다. 산모퉁이를 돌자 드디어 응달. 축축한 물기를 먹은 흙에 경계심을 품었다가 순간 당황했다. 흙탕물이 고인 곳에는 어김없이 마른 낙엽이 소복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발걸음을 옮겨 한 모퉁이를 더 돌자 쪼그려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낙엽과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물이 고인 곳을 메우고 있었다. 뒷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손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비 갠 다음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신 듯했다.

평일 점심식사 후 연암공원 등산, 주말 두 바퀴로 달리는 신천 나들이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지난 주말에도 상동교를 출발해 다리를 하나하나 세 가며 자전거로 봄기운을 마셨다. 개나리와 벚꽃이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필자의 가슴도 부풀었다. 신천 행락객의 안전을 고려해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보행자 길과 자전거도로를 구분해 놓은 것도 주말 봄나들이를 훨씬 가볍게 했다. 한층 맑아진 신천과 금호강을 따라 꽃과 나무와 사람을 보며 정겹게 달렸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노인, 아이와 공놀이를 즐기는 부부, 친구들과 농구나 족구에 땀 흘리는 학생, 게이트볼에 빠진 할머니와 할아버지,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으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신천은 시민들에게 너무도 평화롭고 아늑한 공간이다. 주말과 휴일 여행을 위해 굳이 도심을 빠져나가거나 외국으로 향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금호대교를 돌아 다시 상동교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애완견 한 마리가 자전거도로 한복판에서 큰 볼일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석진 숲 속에서도 아니고. 주인은 볼일을 본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유히 자전거도로를 빠져나갔다. 상큼한 봄기운이 갑자기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애완견의 뒷정리를 위해 작은 수레를 끌며 산책에 나서는 일본인과 유럽인들, 연암공원 야산에서 낙엽을 줍던 아주머니의 모습이 교차했다.

문득, 공자가 타이름을 포기한 한 남자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공자가 제자들과 신작로를 걸었다. 한참을 걷다 공자가 갑자기 가로수 뒤편으로 쫓아가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숨어서 오줌을 누는 남자를 발견한 것이다. 공자는 반성의 빛을 보인 그 남자를 뒤로한 채 또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길 한복판에서 똥을 누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제자들은 '이제 큰일 났다'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공자는 그 남자를 모른 체하고 길가로 돌아 지나가 버렸다. 제자들은 물었다. "숨어서 몰래 오줌 누는 자에겐 호통을 치고, 정작 길 한복판에서 대놓고 똥을 누는 자는 왜 모른 체한 겁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지만 큰 잘못을 행하는 이는 돌려세우기가 어렵다. 그래서 포기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공원이나 도로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만 가진다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다툼을 벌이는 일이 없을 게다. 좁게는 부부 생활에서부터 넓게는 정치나 국제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터다. '배려 바이러스'가 널리 퍼진다면 작은 갈등부터 큰 분쟁까지 쉽게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작은 배려심이 쌓여 큰 바다를 이룸으로써 공자마저 포기해 버린 남자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꿈꿔본다.

북한도 한민족에 대한 배려 없이 전쟁 분위기만 고조시킨다면 국제사회 전체가 등을 돌리는 '공자마저 포기한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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