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성률의 줌인] 강우석 감독 변화 '전설의 주먹'

거친 세상 사는 중년 가장에 날리는 조촐한 위로상'

2000년대를 전후로 강우석은 '충무로의 지배자'였다. 이런 표현이 과격할지 모르지만, 그 시절 그는 단연 '충무로의 1인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한국영화계가 좌지우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시네마서비스의 대표 강우석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지만,'감독 강우석'은 점점 소외되어 갔다. 그가 신작을 연출해도 다른 스타 감독에 비해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다. 이제 영화배급권을 CJ에 넘긴 이후 왜소해진 강우석은 오히려 활발히 연출 활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축복인가, 불행인가? 나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강우석은 언제나 강한 남성들의 대결을 스크린에 재현했다.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제목이'마누리 죽이기'인 코미디를 만들 지언정 멜로적 정서는 그의 영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가 그린, 힘 있는 남성들의 대결 구도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 쉽게 연결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가 받은 비판 대부분이 국가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곳에서 분출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남성영화?

'이끼'에 이어 다시 웹툰을 원작으로 한 '전설의 주먹'은 외형적으로는 전형적인 강우석 영화이다. 강한 남성의 대결을 노골적으로 직시하고 재현하는 것. 고교 시절, 동네의 전설이었던 이들을 모아 직접 격투기 시합을 시키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부인과 사별한 후 국숫집을 운영하며 혼자 딸을 키우는 임덕규, 그는 당시 사당고의 전설이었다. 섭외가 오지만 당연히 나가지 않는다. 자신은 주먹이나 휘둘렀던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딸이'사고를 쳐'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나가야 했다. 대기업 회장과 고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그 기업의 홍보부장이 된 이상훈. 그는 회장이 룸살롱에서 사고를 친 후 이를 수습하기 위해 방송에 나가야 했다. 한때 남서울고 독종 미친개였지만 지금은 삼류 건달인 친구 신재석도 이 시합에 나온다. 영화는 외형상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다른 이들의 격투기를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세상에 스포츠만 한 드라마가 또 어디 있겠는가.

◆과거와 현재, 소박한 결말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단순한 스포츠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전설의 주먹'은 과거 전설의 주먹이었던 이들의 영광을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다. 전설의 주먹이었던 이들은 고교 졸업과 동시에 동문회와 동창회의 이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왜 그들은 사라졌고, 지금은 얼마나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영화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이 때문에 자존심 따위는 아예 팔아버린 40대 중반 가장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임덕규는 처량한 신세다. 딸은 자신과 말도 섞으려 하지 않고, 국숫집은 장사가 되지 않는다. 그 흔한 친구도 없다. 이상훈은 과거 친구였지만 지금은 회장인 손진호에게 철저히 무시당하며 살아간다. 출구는 없다. 신재석은 삼류 건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임덕규와 이상훈은 아빠이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가슴 속에는 불덩이 같은 분노를 품고 있지만, 이를 삭히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신재석은 뭔가 새로운 삶의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렇게 삼류 건달로 인생을 마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 아픔'들'이 영화 속에 속속들이 살아있다.

강우석은 이들이 다시 예전과 같은 친구가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과거처럼 서로를 위해 주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현재의 모습에서 영화가 시작되어 마지막도 현재에서 끝맺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이 거친 세상에서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야 한다. 과거 전설의 주먹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멍에를 지고 살아갈 필요도 없다. 그들도 충분히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거친 세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있어야 한다. 임덕규와 딸이 서로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영화의 결말인 것은 이 영화가 꽤 소박한 영화라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40대 가장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강우석의 변화

이런 영화이기 때문에 강우석이 그간 비판받았던 지점과는 명확히 갈라선다. 아니, 국가주의와 결합한 남성들의 폭력의 반대 편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강우석은 그동안 하지 않았던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도 수행한다. 고교 동창인 재벌 후계자는 깡패처럼 살아간다. 심지어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행위를 통해 지금의 재벌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88서울올림픽 때문에 성급하게 진행한 사당동 재개발이 어떤 문제를 불러왔는지 직시하고, 사건을 자신들의 편의와 용도에 따라 조율하는 언론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그렇다면, 강우석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로 의외였던 것은 이것이다. 어떻게 강우석은 강한 남성의 대결이라는, 같은 소재로 전혀 다른 요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명확한 것은 '전설의 주먹'의 강우석은 지금,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힘들게 살아가는 중년 남성들에게 조촐한 소주 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rosebud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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