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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이야기] 대구 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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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난 문화가 일찍 자리 잡은 곳으로 한국을 대표할 만한 굵직한 인물이 많았다. 동양란의 첫걸음을 집필한 박효기님을 비롯해 필자의 사부(師父)인 정정은, 구자훈(전 경북대병원장), 이정길(전 대구가톨릭대의료원장)님 등 고명대가(高名大家)들이 있다.

1980년대, 달서구 월배에서 서부정류장 인근까지 난원이 무려 7개나 있을 정도로 열풍을 이루었다. 23세 나이로 난 사업에 뛰어든 필자의 눈에는 대한민국 난의 중심은 바로 대구였다.

1980년경 대구경북은 난초의 붐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는데, '매란 정'에는 토요일마다 난 경매와 강좌가 열렸다. 또한 주말이면 난 애호가들은 미니버스(봉고)를 대절해 난 명산지(名産地)로 달려갔다. 명품종(名品種)의 군락을 발견한 전설적인 산채인도 있었다. 채집한 난이 무려 1억원가량 되는 사례도 있었다.

1980년 당시 대구를 대표하는 난동호인회(蘭同好人會)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대구난우회와 자생란보존회를 비롯해 10여 개가 생겼다. 난 상점에 근거지를 둬 퇴근하면 매일같이 모여 학습했으며 주말 산채 갈 지역과 신품종을 공부했다.

3월이면 각 회의 특성을 표현한 전시회가 열렸다. 1990년 초 난을 구해오는 날이면 20여 개의 난 상점마다 우수 신품종을 구입하기 위해 새벽부터 모여들었다. 물건(난)을 보지도 않고 선금을 내 입수하는 분들도 많았다. 당시 수석과 골동품, 그리고 분재를 능가하는 붐이 조성됐다. 그야말로 난은 중년 남성의 시대적 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열기는 높았으나 기술적 적립은 부족해 기술(안목)을 가지고 난 상점을 돌며 쓸 만한 난을 사냥하는 족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일부 난 상점 주인보다 한 수 위의 안목(숙련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남지역의 1인자가 되려는 꿈을 가진 필자는 제대로 된 숙련기술을 가지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필자는 1991년 난 사업을 접고 당대 한국 최고의 화예품 대가인 '영남난원'(嶺南蘭園) 대표 정정은님의 수제자로 입적해 무급으로 2년간 체계적인 도제식 지도를 받았다. 이후 필자는 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대건(난초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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