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의 여유.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삶의 활력소이자 쉼표다. 자판기 커피로 나름 여유를 즐겨 보지만 뭔가 부족하다.
대구에는 동성로 등 도심은 물론 아파트단지, 단독주택가 구석구석까지 커피를 위주로 한 카페들이 생겨나고 있다. 앞산과 수성못 인근에 크고 작은 카페들이 밀집해 카페촌을 이루고 있는 데 이어 수성구 만촌 2동 '교수촌'도 카페촌으로 변신하고 있다. '교수촌'은 기존 카페촌과 다른 점들이 많다. 맛과 인테리어가 붕어빵 찍어낸 듯한 대형 프랜차이즈가 없다. 이곳 카페들은 주인들의 다양한 특성만큼 특유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교수촌에서 카페촌으로
"30년 넘게 살았지만 이런 풍경은 생각도 못했죠." 대구 수성구 만촌 2동 일명 '교수촌'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30여 년째 살고 있는 김정미 씨는 요즘 집앞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이 믿기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젊은이들과 주부들이 골목을 누비고 2, 3층짜리 오래된 주택들이 하루아침에 알록달록 단장한 카페로 변신 중이다. 1970, 80년대 교수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교수촌으로 불리던 만촌 2동의 조용한 골목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교수촌은 무열대 맞은 편에서 조금 내려온 지점인 태왕아너스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교수촌마트'가 나타나고 이곳을 중심으로 네거리가 형성되는데 이 일대를 교수촌이라고 부른다. 네거리를 중심으로 카페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오르막길 초입에 '하늘정원'이 있고 맞은편에 '라피로티'(LAPILOTI)가 있다.
교수촌마트에서 왼편으로 교수촌 언덕길. 들머리 오른쪽에 '브랜치 컴퍼니', 맞은편에 '해피니스 인 커피', 이어서 '놀'(KNOLL)이 나타나고 '장영실'이 마주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다천산방'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그림 참조)
이곳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교수촌마트 옆에 있는 김밥집 주인은 "1, 2년 사이 반경 50m 안에 5개의 카페가 생겨나 동네 분위기까지 바뀌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교수촌은 물론 인근 주택가까지 카페가 들어서고 있단다.
번화가에서 먼 탓에 싼 임대료가 오랜 기간 유지돼 온 전형적인 동네상권이었다. 그러나 카페의 등장으로 상권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유동인구가 급증하고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찾아오면서 동네가 활기를 띠는 선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주민들도 하나둘씩 이방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지금은 카페촌이 형성됐다. 카페에 이어 현대식 주택의 모습을 한 한식당, 출판사, 공방 등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기자가 이곳을 찾아간 날도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평범한 주택가였지만 상업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부동산경기 침체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를 띠고 있다. 조성희 공인중개사는 "집주인들이 단독주택을 카페나 공방, 꽃집 등으로 리모델링 하고 있다. 지역 부동산 경기가 침체돼 있지만, 이곳만은 예외다"고 했다.
◆예술인들이 만드는 차
여느 카페촌과는 분명히 다르다. 우선 단독주택을 카페로 리모델링했다. 또 커피는 물론 각종 차와 식사, 이국적인 소품을 사고 취미도 배울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는 점도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즐비한 여느 카페거리와 달리 프랜차이즈가 하나도 없다.
왜 그럴까? 카페주인들의 '철학'이 남달라서다. 커피 열풍에 편승, 카페들이 도심 곳곳에 생겨나고 있는 게 현실. 당연히 장삿속을 채우려는 주인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의 카페 주인들은 이런 추세에서 조금 비켜나 있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다. 커피나 차를 판다기보다는 스스로 차를 즐기고 이해한다고 말한다.
주인의 철학을 닮아 인테리어부터 남다르다. 2011년 6월 오픈한 라피로티는 대구에서 처음 생긴 티룸(tea room)이다. 라피로티(Rapiloti)는 건축학 용어를 합성한 말로 '태양의 기둥'이란 뜻.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이름 지었단다. 동양화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문희 씨가 수학 교사 출신인 언니 지영 씨, 식품제조회사 출신인 오빠 태우 씨와 의기투합했다. 라피로티는 한국 티룸 문화에 씨를 뿌리고 꽃피워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2층에 마련된 티룸은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인 안도 다다호가 직접 인테리어한 것처럼 느껴졌다. 노출공법이나 시멘트 공법 특유의 시크함과 견고함이 부드러운 홍차 맛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최근 신문'방송의 취재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지역 홍차 마니아 사이에는 알려진 곳. (이날 매일신문사 취재진에게 최초로 내부취재를 허용했다.) 주인 김문희 씨는 "대구에 카페가 넘쳐 나고 있지만 제대로 된 티룸은 없는 것 같다. 홍차와 커피가 어떤 것인지 원론에 가깝게 즐길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다.
작은 언덕이라는 뜻의 카페 '놀'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직접 만든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다. 세 자매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첫째 김연현 씨가 빵을 담당하고, 바이올리니스트인 둘째 도연 씨가 로스팅을, 셋째 보연 씨가 바리스타 역을 하고 있다. 핸드드립(손으로 뜨거운 물을 부어서 내려 만든 커피)한 여러 종류의 커피와 브런치 등을 판매한다. 핸드드립 커피교실도 함께 연다. 연현 씨는 "천편일률적 프랜차이즈 커피 맛에 싫증을 느끼던 고객들이 다양한 고급 커피를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어 좋아한다. 우리 카페에는 소규모 카페 특유의 안락함과 편안함, 개성 넘치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고 자랑했다.
커피머신이 붕어빵을 찍어내듯 커피를 만들어 낸다면 이곳은 모두 핸드메이드를 지향한다. 지난해 6월 오픈한 '해피니스'는 주인 정용철 씨가 직접 로스팅하고 향과 맛을 낸다. 정 씨는 손님들의 웰빙을 위해 약배전(연하게 커피를 내는 기술)을 배웠다. 지금은 달인의 경지다.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커피맛과 웰빙을 제공하기 위해 직접 로스팅한다"고 설명했다.
'브랜치 컴퍼니'는 인테리어 사무실이 카페가 된 경우. 인테리어 사무실인데 그 공간이 카페처럼 보여 행인이 불쑥불쑥 들어와 커피를 달라고 해서 아예 카페로 탈바꿈했다. 이곳에는 카페 한쪽의 작은 화원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유기농 채소를 재배해 손님들에게 내놓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장영실'은 조선시대 과학자 이름을 상호로 사용했다. 양옥집 반지하 공간을 카페로 리모델링했는데 이 거리에서 가장 앙증맞다. 인디고 블루빛 진열대가 인상적이다. 주인 김진희 씨는 최근까지 은행에서 근무하다 바리스타로 변신했다.
◆교수촌에 교수(?)가 없다
교수촌에는 2010년부터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원래 만촌 2동은 예전에 산야가 많았다가 대구시에 편입된 후 많은 부락이 새롭게 형성됐다. 교수촌'예술인촌'기자촌은 이러한 시기에 형성됐다. 몇몇 주택업자들이 고급주택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교수촌'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교수'예술인'기자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유치하고자 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교수촌에 사는 교수가 몇 명에 불과하다. 교수촌 입구에 위치한 태왕아너스 아파트에 영남대 교수 몇 명이 사택으로 이용하고 초기 멤버들이 인근에 살고 있는 것이 교수촌의 유일한 흔적이다.
40년이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천병기 전 영남대 교수는 "교수촌이 생길 때인 1971년 당시만 해도 이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경북대, 영남대, 대구대 교수들과 건축가들이 의기투합, 교수촌을 만들기로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40명이 넘는 교수들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5명 정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1971년 교수촌이 처음 생길 때 맨 처음 정착한 1호 교수로 알려져 있다.
평범한 골목에서 자칫 슬럼가로 변할 뻔한 이곳이 카페촌으로 재탄생한 것은 상대적으로 싼 땅값과 교수촌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한몫했다. 수성구에서는 비교적 개발이 뒤늦게 이뤄진데다 도심과 멀지 않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주변경관이 품격있는 '카페촌'으로서의 면모를 갖췄기 때문이다. 특히 인근에 아파트와 주택이 많아 들어서 젊은 세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발길이 잦다. '장영실'의 주인 김진희 씨는 "주택가라 조용하고 도심에 비해 비교적 월세가 싸고, 가로수 등 거리풍경이 운치가 있어 카페를 인수하게 됐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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