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15>치과의 역사<상>

1910년 9월 대구자혜병원서 지역 치과 진료 시작

도립 대구의원에서 치과 진료를 하면서 학생들이 임상실습을 하고 있다. 치과학교실이 개설돼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의학전문학교 교과과정 중 한 과목이었을 뿐이다. 경북대치과병원 제공
도립 대구의원에서 치과 진료를 하면서 학생들이 임상실습을 하고 있다. 치과학교실이 개설돼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의학전문학교 교과과정 중 한 과목이었을 뿐이다. 경북대치과병원 제공

1885년 제중원을 연 의사 알렌은 치과 진료도 했다. 자신에게 이를 뽑아달라고 온 한국인이 있어서 의과대학 시절 외과 수업을 기억해 뽑아주었다고 한다. 제중원의 발치 치료가 바로 한국 근대 치의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알렌과 헤론이 제중원의 진료 실적을 기록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연도 보고서'에는 치과 분야의 다양한 진료 기록이 담겨 있다. 1년 동안 충치 치료 60건, 발치 15건을 비롯해 구내염, 치통 등 다양한 치과 진료를 했다.

이후 제중원을 맡은 애비슨의 1901년 보고서에 따르면, 치아 274개를 학생 조수가 발치했고, 어려운 경우엔 자신이 직접 했다고 나와 있다. 치아가 썩거나 잇몸에 생긴 질환이 심각해졌을 때 이를 뽑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첫 한국인 치과의사는 함석태

일제는 강점기에 도입된 치의학이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고 병든 자를 위한 시혜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고 일제 침략을 무마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이처럼 근대 치의학은 전통 치의학과 관계없이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사(이를 심는 기술자)에 의해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과 일본군 치료를 위해 시작됐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1894년 청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인은 급속하게 늘었다. 이 무렵 건너온 인물이 우리나라에서 첫 치과의원 개업을 한 노다 오지(野田應治)다. 도쿄에서 치과 공부를 마친 그는 1893년 7월 인천에 있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치과를 개업했다. 그러나 주고객인 일본인 수가 적어서 이듬해 4월 서울 남대문에서 노다치과의원을 열었다.

이후 일본군을 따라 치과의사가 잇따라 왔으며, 일본인 단체 등이 설립한 병원에 치과의사들이 배치됐다. 일본인 여성으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치과대학을 졸업한 나카무라 야스코(中村安子)가 1909년 치과의원을 개업했다.

한국인 치과의사는 치과의사제도가 마련된 뒤 생겼다.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규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3월부터 법령이 실시됐다. 한국에서 치과의사가 되려면 치과의사규칙에 따라 조선총독의 면허를 받아야 했다. 치과의사 면허 제1호로 등록된 치과의사는 함석태였다. 1889년 평안북도 영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러일전쟁(1904~1905년) 때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 면허를 받았고, 그해 6월 '한성치과의원'을 열었다.

그는 한국인의 구강 위생이 심각하다고 여겼다. "일본 아동들은 칫솔을 사용하지만 조선 아동들은 손가락으로 소금을 묻혀 사용한다. 그러나 잘 닦지 않아 입안 위생이 얼마나 나쁜지 모른다"고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앞서 알렌의 기록에는 '한국인이 아침에 일어나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는다. 한국인은 거의 누구나 훌륭하고 진주같이 하얀 치아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보철은 발달하지 않았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것이 상식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치과의사시험 합격자 대부분은 일본인

이때까지만 해도 치과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시험 없이 면허를 받아 의원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치과진료를 하는 입치사(入齒師)와 치과의사 사이의 갈등이 심각했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일본에 있던 입치사는 학문적 연구 없이 간단한 기공만을 도제식으로 배워 치과질환 치료나 발치, 인공치아심기(입치) 등을 시술했다. 1906년부터 일본 내 입치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자 설 자리를 잃은 입치사들은 대거 한국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한국의 치과 진료를 거의 도맡고 있었다.

일제는 입치사를 구제하기 위해 시험을 도입했다. 시험을 통과하면 치과의사 자격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1921년 총독의 주치의이자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인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의 건의로 시험제도가 만들어졌다. 시험을 치를 자격은 수업연한 3년 이상 치과학교 졸업자 또는 5년 이상 치과의술을 수업한 자로 정해졌다. 원래 목적은 입치사에게 치과의사 면허를 줘서 지방에 배치하려던 것이었지만 시험 난이도가 높아서 입치사들은 합격할 수 없었다. 시험 합격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적었다. 1921년 10월 9일 첫 치과의사시험에서 고상목이 합격해 국내에서 배출한 첫 치과의사가 됐다.

1930대 중반 무렵 한국인 치과의사 생활수준은 꽤나 높았다. 치료 비용은 발치 80전~1원, 치료비 30전, 금니씌우기 5원, 틀니 15~30원, X-선 한 장 50전 정도였다.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한 치과의사의 경우 한 달 수입은 300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물가는 대학 출신자의 첫 월급이 10~15원이었고, 냉면 한 그릇에 15전, 3~5원이면 고급스러운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물가 수준과 비교하면 치과의사의 수입은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부터 대구자혜의원에서 치과진료 시작

일제는 1910년 9월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를 발표하면서 대구 동인의원(1907년 개원)을 인수해 관립 대구자혜의원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대구에서도 치과 진료가 시작됐다. 대구자혜의원 진료과목에는 내과'외과'산부인과뿐 아니라 치과도 포함돼 있었다. 치과진료가 시작됐지만 별도로 치의학 교육기관이 세워져 치과의사를 양성한 것은 아니었다.

관립 대구자혜의원은 1923년 도립 대구의원으로 개편된다. 이 무렵 상황을 보면 치과는 개설돼 있었지만 치과의사가 근무했다는 기록은 없다. 짐작건대 외과의사가 치과 진료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경상북도 의료기관과 의료인력'에 따르면, 대구를 포함한 경북 전체의 의료기관은 15곳에 불과했으며, 근대 의학을 배운 의사도 68명에 그쳤다. 이들 중 한국인은 12명에 지나지 않았다. 치과의사의 수는 4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던 것이 1931년 대구부 통계에 따르면, 치과의사가 23명으로 크게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에게 '개업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것으로 보아 모두 치과 개원의였다.

한편 정식 치과학교실이 개설된 것은 도립 대구의학강습소가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한 1933년 3월이었다. 당시 다카(高達) 교수가 겸임교수로 임용돼 1940년까지 치과학교실을 운영했다. 이어 치과학교실 조교수였던 후쿠다(福田博)가 1940년 다카 교수가 사직하자 뒤를 이어 1945년 광복 때까지 대구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을 운영했다. 당시 대구도립의원을 찾아온 치과 환자는 적잖았다. 1933년 치과 환자는 연간 5천670여 명에 이르렀고, 1937년에는 1만1천200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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