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일 대구시장이 사석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있었던 일화를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 전용 헬기를 함께 타고 가며 국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던 이 전 대통령이 불쑥 "어떻게 대구시는 지나가는 예쁜 여자만 보면 다 내 꺼라고 떼를 쓰냐?"며 "나도 고향에 신경 많이 쓰는데…"라더라는 것이다. 당시 대구시는 첨단의료복합단지와 남부권 신공항 유치 경쟁을 했다.
김 시장은 허물없이 농담할 정도로 대통령과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구시장에 대한 우회적인 핀잔으로 들렸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정부 지원을 따내지 못하고, 다른 지자체가 먼저 시작한 것에 뒤늦게 숟가락을 걸쳐 대통령 입장이 어렵다는 뜻으로 이해됐다. 물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대구시의회 문화복지위원회(문복위)가 뒤늦게 숟가락을 걸치는 대구시를 똑 닮았다. 그나마 대구시는 지역 발전이라는 명분이 뚜렷했고 실리도 챙겼지만, 문복위는 비난 받기 좋을 '힘 과시용'이다.
문복위는 지난 24일 대구오페라재단 설립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실질적으로 대구시가 재단 설립을 추진한 2009년 이후 4년 만이다.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시의 늑장 행정과 문복위의 발목 잡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오페라하우스, 대구시립오페라단, 국제오페라축제 조직위원회가 파행했다. 임기가 끝난 관장과 감독을 1년 연장 형태로 연임시켰고, 개방형 관장직에 공무원을 임명했다. 심지어 오페라하우스 관장 공모 심사 때는 재단 설립 시 사표 제출을 전제하기도 했다.
그동안 문복위는 재단을 설립해도 실익이 없고, 다른 국제축제의 재단화 요구를 막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오페라재단 설립을 반대했다. 심지어 현재 문복위 위원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별다른 상황 변화가 없는데도 재단 설립 조례안이 통과됐다.
그 이유는 조례안에 들어 있다. 이번 안은 정관 개정 때 이사회 의결 뒤 문복위 승인(문구는 제출이지만, 이재녕 대구시의회 문복위원장은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힌 바 있다), 대표 또는 상임이사의 권한 축소 등 중요 부분에서 대구문화재단 조례 개정안과 토씨까지 같다. 시점도 묘하다. 오페라재단 설립 절대 불가를 외치다 대구문화재단 조례를 뜻한 바대로 고친 다음 승인했다. 만약 대구문화재단 조례 개정 전이었다면 이번에도 시의회가 낄 명분이 없다. 결국 문복위는 숟가락을 얹을 기회를 찾기 위해 오페라재단 설립을 반대한 셈이 됐다. 의회가 간섭하고 싶은데 대구시가 그 뜻을 몰라주니 억지 논리를 내세워 반대한 것으로 비친다.
대구문화재단 조례안 개정 때, 이에 반대하는 대부분 재단이사가 사퇴하고, 대구 문화예술계의 반발이 컸다. 그러나 문복위는 이번 오페라재단 조례 제정에서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고, 설사 옳지 않다 하더라도 충분히 밀어붙일 힘이 있음을 과시했다.
이번 사태의 가장 나쁜 점은 전문가를 초빙해 자율과 창의로 문화예술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역행한 선례를 남긴 데 있다. 조례를 악용하면 이사회가 정관 개정을 의결해도 문복위가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지난 대구문화재단 때처럼 이사들 모르게, 또는 아무리 반대해도 조례를 고칠 수 있다. 전문가를 존중하기는커녕 재단 대표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은 언제든지 문복위가 제재할 수 있는 '아랫집단'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 속에 숨은 뜻은 재단이 알아서 의회 입맛에 맞추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복위의 횡포를 제재할 방법은 없다. 대항할 유일한 힘은 대구 문화예술인과 단체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무관심하거나 외면한다.
대구시는 공연문화중심도시, 문화예술도시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 주체인 문화예술인은 천대한다. 시 공무원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의회까지 나서 문화예술인의 창의적인 활동을 제한하는 숟가락을 들고는 자신들의 장단에 '꼭두각시 춤'이나 추라고 요구한다. 이 역행의 책임은 분명히 문복위와 대구시에 있다. 하지만, 스스로 추는 신명 춤인지 꼭두각시 춤인지도 모르고, 시와 의회 눈치 보기만 급급한 대구 문화예술계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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