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든다.'
대구 중구 북성로 공구골목. 지난 1990년대까지 국내 모든 공구가 이곳으로 모일 만큼 공구계의 '골목대장'이었다. 없는 게 없을 만큼 풍부한 공구와 뛰어난 기술력으로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든다'는 말이 나돌 만큼 유명했다. 1950, 60년대에 미군 군수용 공구를 유통하는 상점들이 모이면서 형성돼 베트남전, 미군부대 군용부품들이 유입되면서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후 공구 판매점이 전국적으로 분산되면서 공구골목도 옛 모습을 잃어 갔다. 인근 350년 전통의 약전 골목, 근대문화골목, 봉산문화거리 등 대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들이 새 단장을 하는 동안 공구골목은 기름냄새 풀풀 풍기는 '공돌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공구골목이 변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예술의 옷을 입으며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공구골목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 들어서고 이색적인 카페들도 하나둘씩 생겼다. 임금이 왔던 어가길도 생긴다. 밋밋한 거리 이미지를 벗고 걷고 싶은 매력적인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골목대장의 귀환
북성로 공구골목. 1㎞ 남짓한 도로 양쪽에 300여 공구가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달 16일 찾은 골목 점포 곳곳에선 내리쬐는 폭염에 맞서 용접기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 뜨거운 기운이 후끈 올라온다. 대구역 방향 입구에서 200m쯤 걸어 들어가자 시원한 광경이 펼쳐진다. 허공에서 수돗물이 '콸콸콸' 흘러내린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다. 허공에 설치된 수도꼭지는 이곳에서 장사하는 협동조합설비 김성태 대표가 직접 제작한 것. 공구골목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재미있을 것 같아 만들어 봤단다. 시원한 풍경에 정신을 차려보니 흰색 벽에 기와를 얹은 2층짜리 일본식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5월 23일 세워진 전국 최초의 '공구박물관'이다. 입구로 들어서자 보기에도 50~60년은 족히 돼 보이는 낡은 미제 탱크가 위용을 뽐낸다. 1970년 플라스틱 제품을 찍어 내던 사출기를 구해다 망치로 두드리고 잘라 만든 탱크 포신이다. 벽에는 일제강점기 때 쓰였던 나무 손잡이로 된 드라이버, 줄자, 한국전쟁 당시 군수품인 알루미늄 드럼통도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 공구골목 상인들이 쓰던 영수증과 렌치'칼'공구'도면 등이 전시장 곳곳에 걸려 있다. 이곳의 공구는 모두 상인들이 기증한 것이다. 공구박물관은 1층 전시장(45㎡)과 2층 다다미방(31㎡)으로 꾸며져 있다. 전시장에는 낡은 공구 1천여 점이 보존돼 있다. 1층에는 북성로 기술자들의 작업공간을 재현한 방과 공구상들의 사무공간이 재현돼 있다. 2층은 다다미방을 원형 그대로 살린 세미나 및 교육공간이다. 박물관엔 하루 평균 100여 명이 찾고 있다. 방학을 맞아 이곳을 찾은 이준호(경북대 건축과 3년) 씨는 "일제시대의 건물과 북성로의 특징을 잠 담아 낸 것 같다"며 만족했다.
공구골목엔 역사적인 건축물도 많다. 삼성그룹의 모태로 불리는 삼성상회 터와 대구 최초의 대중목욕탕인 조일목욕탕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대구 최초의 미나카이백화점도 옛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일본식 건물에서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파는 삼덕상회도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 때 건물인 야마구치도예점은 영화 세트장 분위기를 풍겨 사진촬영 명소로 꼽힌다. 공구골목 끝에 자리한 사찰 대성사는 1906년 광문사(출판사)가 있던 곳이다. 이듬해 국채보상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예술'문화를 빨아들이다
근대건축물은 아니지만, 북성로 일대의 비어 있는 폐가를 활용한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들도 생겼다. 젊은 예술'문화인들도 이곳을 찾으면서 북성로는 대구의 문화예술인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지난 5월 들어선 '장거살롱'은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장거는 자전거의 경상도 사투리다. 거리에서 봤을 때는 단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미로같이 연결되어 있다. 2층, 3층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전혀 3층으로 보이지 않지만 3층이다. 1층은 작은 커피숍과 자전거 수리를 하는 공간, 2층은 DIY(Do It Yourself'폐목재 등을 이용한 자체 작업) 작업실과 미술 작업실로 활용하고 있다. 함께하는 재주 있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다. 옥상에는 동아리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틈틈이 파티를 벌인다. 많은 청년이 찾아 세미나도 열고 모임도 하면서 서로의 꿈을 나누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약전골목에 있던 주민목공소도 여기로 옮겼다.
이곳에서 만난 최현석 씨는 "이 골목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자전거 관련 모임도 하고, 파티도 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전거, 목공, 그림과 관련한 작업은 물론 토크 콘서트 등을 한 건물에서 할 수 있어 비용 부담도 줄고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공간에서는 프로모션, 디자인, 제작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달에는 재즈와 게스트 하우스가 결합된 '판'이 문을 연다. 재즈 라이브 바와 게스트 하우스를 병행해 운영하는 복합 문화서비스 공간. 이곳의 손미숙 대표는 "대구는 물론 인근 울산'구미 등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라이브 공연과 게스트 하우스 운영을 함께할 계획이다"고 했다.
문화예술공간인 'space 우리''예술공장' '아키텍톤' 등도 공구골목을 빛내고 있다.
◆쉬이~ 물렀거라! 임금님 행차시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재위 1907∼1910)은 일제에 병합되기 1년 전인 1909년 대구를 찾았다. 순종은 어가(임금이 타는 수레)를 타고 북성로와 경상감영 일대를 둘러봤다. 이를 계기로 달성공원∼북성로 약 1㎞ 구간은 '어가길'로 불린다.
이 어가길이 복원된다. 중구청은 2016년까지 70억원을 들여 어가길 역사거리 조성과 공구골목 경관 개선을 추진한다. 대구 근대사에서 뺄 수 없는 공구골목 일대를 문화공간으로 꾸며 관광지로 만들려는 계획이다. 올해 국토교통부 주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 공모사업에 선정돼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 다만, 이름은 어가길이 아닌 '황제의 길'이다. 북성로∼서성로(1.6㎞)에는 휴식 공간과 상징 조형물을 설치한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우현서루(현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와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광문사 터(현 수창초교 후문) 등지는 역사공원으로 조성된다.
황제의 길과 더불어 '구국의 길'(가칭)도 추진된다. 공구골목 인근의 삼성상회(삼성그룹 발상지) 터를 출발점으로 공구골목과 광문사 터 등을 걷는 코스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2'28 민주운동기념회관∼국채보상운동기념회관으로 이어진다.
또 올해 내로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들어선다.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삶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관으로 거듭난다. 1997년부터 대구경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추진하고 있다. 현재 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각종 캠페인이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역사'문화'관광의 다각화 및 현대적 재현을 통해 대구를 대표하는 거리의 하나인 공구골목이 역사적 문화공간으로 재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대구의 오늘을 만든 유산이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나 시민과 관광객의 관심을 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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