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미상. 갑자기 나타난 거인에 의해 멸종 위기에 처한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50m의 거대한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성 밖에서는 키가 3~15m에 달하는 식인 거인들은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잡아먹는다. 그로부터 100년 후 50m에 달하는 초대형 거인의 등장으로 벽이 무너지고 거인들의 인간사냥이 시작된다. 어머니가 거인에게 먹히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소년 엘런 예거는 거인의 정체를 밝히고 맞서 싸우기 위해 조직된 '조사병단'에 입단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초대형 거인으로 변신하는 등 미스터리한 반전이 거듭된다.
◆진격의 거인 한반도 상륙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만화 속 거인에게 무기는 필요 없다. 최대 50m가 넘는 거대한 몸뚱어리가 병기다. 그에 대항하는 인간은 가냘픈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일본 만화 속 거인이 현실세계로 뛰쳐나왔다. 이 거대한 식인 거인이 일본을 넘어 한국을 집어삼킬 태세다.
일본에서 시작된 거인의 진격은 지난 4월 한반도에도 상륙한 이후 말 그대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고 있다. 만화에 이어 애니메이션까지 방송을 타면서 한반도에 진격의 열풍이 불고 있다.
진격의 수박, 진격의 아파트, 진격의 햄버거, 진격의 콜라, 진격의 축구선수…. '진격'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격 중이다. TV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가 하면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장치가 실물 장난감으로 팔린다. '진격'이라는 말을 달지 않으면 유행이 되지 않는다. 키 큰 축구선수나 키 큰 연예인에게는 '진격의'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붙고 진격의 치킨 배달, 진격의 콜라 등 패러디물도 쏟아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이미 진격의 거인이 점령한 상태다. 실시간 검색어에 '진격의 거인'은 물론 '진격'이 들어간 단어가 수시로 순위권을 오르내린다. 진격의 칫솔, 진격의 베어, 진격의 게임, 진격의 때밀이 등 게임과 상품에서부터 시사적인 것까지 '진격'을 붙인 패러디물과 관련 콘텐츠가 홍수를 이룬다.
안방극장도 진격의 거인이 점령했다. '진격의 준하'와 같이 TV 프로그램에서 '진격' 패러디 자막이 등장하는 것도 다반사다. 모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12일부터 '진격의 가족'이라는 코너를 신설하기도 했다. 신문지상에서도 진격의 폭염, 진격의 부동산 시장 등 진격이라는 단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 4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TV로 방영된 후 불과 몇 개월 만의 일이다.
정치권에도 진격의 거인이 등장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을 풍자한 '진상의 거인'이 등장 후 이달 7일에는 민주당이 박근혜 대통령을 진격의 거인에 빗대기도 했다.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은 국회에서 브리핑을 통해 "저도에서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이 돌진하고 있다. 마치 '진격의 거인'을 보는 듯하다. 박 대통령의 '진격'에는 여도, 야도 없다. 이전 정권도 없다"고 말해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진격'이라는 단어는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적을 향해 공격해 나아간다는 뜻.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더욱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도건우 2040미래연구소 소장은 "진격의 거인이 우리 사회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다소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제목으로 인해 '진격' 신드롬이 일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 적을 침'이라는 뜻을 가진 '진격'은 단어 자체도 군대식 표현에 가깝고 우리 일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것이어서 비유나 패러디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어 올해를 정의하는 단어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진격의 마케팅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진격의 거인' 마케팅 열풍이 불고 있다. 손쉽게 자사 제품이나 콘텐츠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어서다. 음반시장은 일찌감치 진격 마케팅이 불고 있다. 지난달 25일에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OST가 발매되는 가하면 가수들도 패러디 영상을 만들어 이름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룹 에이젝스가 진격의 거인 패러디 영상을 만들어 컴백을 예고했고 그룹 샤이니 멤버 종현은 '진격의 거인'으로 샤이니 새 앨범 표지를 패러디한 사진으로 시장 공략에 나서기도 했다.
유통업계나 음료 음계도 진격의 나팔을 불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진격의 컨디션 서포터스' 모집을 통해 자사 제품홍보에 나서고 있다. G마켓 역시 최근 전국민 무료 배송 이벤트 '진격의 무배'를 진행했다. 이 기간 동안 무료배송 쿠폰을 모든 고객들에게 발급했다.
특히 게임업계는 '진격의 게임'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일부 게임사들은 다양한 패러디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넥슨의 모바일게임 '삼국지를 품다'에서는 최근 '진격의 관우'가 등장했다. 거인처럼 거대해진 관우가 성벽 안쪽을 노려보는 포스터 이미지 역시 '진격의 거인'을 닮았다.
CJ E&M 넷마블도 최근 '대항해시대온라인'의 레벨을 올리면 각종 아이템을 제공하는 '진격의 대항-레벨업 러쉬' 이벤트를 진행했다. 플레이위드도 웹게임 '퍼즐삼국지' 출시에 맞춰 '진격의 선물 러쉬 이벤트'를 진행했다. 온라인게임 '로스트사가'를 서비스하는 위메이드도 최근 '진격의 개발자K'라는 이색 이벤트를 진행했다. 게임 중 급작스럽게 출현하는 '개발자K'를 격퇴한 게이머들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진격의 거인'의 제목을 패러디하거나 모사한 모바일게임들도 눈에 띈다. 지역 게임업체 관계자는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진격의 거인은 젊은층뿐만 아니라 과거 만화를 즐겨 읽었던 세대의 향수까지 자극할 정도로 문화적 트렌드가 됐다. 이를 활용한 다양한 게임과 마케팅들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거인을 둘러싼 논란
지난해 '강남 스타일'이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진격의 거인도 이를 닮아가고 있지만 각종 해석과 분석, 논란이 난무하고 있다. 식인 거인에 도륙당하는 인류가 갑과 을의 세계에서 철저히 약자인 을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또 오랜 경기 침체로 무기력해진 일본인을 상징한다는 분석도 있다. 또 저출산'고령화 위기 속에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일본의 상황과 겹친다는 해석도 있다. 최근 센가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를 둘러싼 중'일 간 힘겨루기가 진행되면서 중국을 거인으로 일본을 성벽에 갇힌 인류로 연결 짓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만화가 가지는 매력도 이에 못지않다. 북구 태전동의 한 만화방에서 만난 김진화(44) 씨는 "'권선징악' 등 뻔하지 않은 세계관과 흔하지 않은 연출이 기존의 만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박진감이 있다. 거인의 정체, 지하실의 비밀 등 작가가 곳곳에 배치해놓은 궁금증을 해결해가는 과정 역시 작품에서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올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갑을 논쟁도 열풍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거인은 '불안한 미래'이며 주인공 앨런으로 대표되는 거인에 대한 분노는 다름 아닌 '젊음의 분노'라는 등식이다. 국내 문화평론가들도 미지의 거인에 대한 공포가 우리 청년세대에게도 미래 없는 취업전쟁에서 나타난 불안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를 짓누른 무력감이 이제는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방송학부 교수는 "스토리 자체는 황당하다. 그러나 이를 접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진격의 거인을 통해 인간의 허무성과 존재성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즉 나약한 인간의 설정은 자신과 동일시되어 현재 사회현상 속에서 발생되는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신자유자본주의 구조, 취업의 현실, 삶의 회복이 서민들에게 더욱 기울지 않는 정치구조, 갑과 을의 사회현상들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어 이에 공감하고 환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철저히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만화의 설정은 보는 이들이 극 속에 몰입해 간접적으로 그 인물이 되고 싶은 것. 잔혹스럽고 공포스러울 수 있지만 또한 그 식인 거인을 동경하는 인간의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고 거기에 사회현상과 맞물려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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