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무 의미가 없던 땅도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로 다져지면 그 땅은 길이 된다.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걸어가는 '순례길'은 수많은 길 중 가장 성스러운 길이다. 대구 도심에도 순례길이 있다. 대구 중구 남산동 '가톨릭 타운'으로 향하는 길이다. 100년을 이어온 길에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여 있다. 굳이 간절함을 담지 않아도 좋다. 유럽의 어느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순례길을 걷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붉은 벽돌의 역사가 열리고
대구 중구 남산지구대에서 수녀원까지 오르는 길의 이름은 '수녀의 길'이다. 수녀원을 오가는 수녀들의 발걸음이 잦다고 해서 또 이 길을 걸으면 수녀들의 기도가 전해져 소원이 이뤄진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수녀의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높은 옹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옹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100년 역사를 간직한 가톨릭 타운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이다.
가톨릭 타운의 시작은 대구교구가 생겨난 1911년으로 올라간다. 당시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따라 남쪽을 관할할 새로운 교구 설립이 필요했다. 물망에 오른 곳은 대구와 전주 두 곳. 전주는 대구보다 신자 수가 많았지만, 대구가 조선의 남방 교구 중심지로 결정된다.
거기에는 서상돈을 비롯한 유력 평신도들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다. 서상돈은 대구교구가 들어서자 자신이 운영하던 남산동 종묘원 3만3천여㎡를 교구에 기증했다.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이 땅을 깎은 뒤 중국인 건축 기술자의 도움으로 교구의 터전을 다졌다. 황량했던 들판에 나무들이 심어지고 그 사이로 붉은색 벽돌의 프랑스풍 건축물이 하나 둘 지어졌다.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성모당이 모두 완성된 1918년 대구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화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도심 속 순례길
가톨릭 타운에 들어서면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쭉 뻗은 산책길이 두 눈을 가득 채운다. 아름드리나무가 만든 터널 사이로 탁 트인 길을 걷다 보면 호젓한 숲 속을 거니는 기분이 든다.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구석구석 숨겨진 붉은색 벽돌 건물을 둘러보다 보면 유럽의 한 도시에 온 듯한 이국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톨릭 타운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성모당'이다. 드망즈 주교는 대구교구 첫 부임과 함께 "교구 기금을 사용하지 않고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을 이루게 해주면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을 짓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드망즈 주교의 소원이 하늘에 전해졌을까. 1913년 주교관 완공을 시작으로 1914년 성유스티노신학교, 1918년 주교좌계산성당 증축이 전 세계 신자들의 헌금만으로 이뤄졌다. 드망즈 주교는 단 1원을 기증해도 편지를 써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성모당은 '꿈은 이뤄진다'는 것을 증명한 장소인 셈이다.
성모당의 효험 탓에 성모당 앞은 종교를 떠나 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 역시 학병으로 끌려간 아들의 생환을 성모당 앞에서 매일 기도 드렸고 김 추기경은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가톨릭 타운 후문 인근에 위치한 '성직자 묘지' 역시 인기 성지다. 붉은색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 입구에는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죽음이 닥쳐온다'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하루도 허투루 살지 말라는 뜻이다. 성직자 묘지는 대구교구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성직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형 김동한 신부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이 밖에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혼합한 양식의 성유스티노신학교 기념관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은 가톨릭 타운의 또 다른 볼거리로 이국적 풍경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베일을 벗다
100년 역사를 간직한 가톨릭 타운의 베일이 벗겨진다. 가톨릭 타운은 그간 천주교 신자 이외엔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화원' 같은 곳이었다. 대구 중구청은 오는 2015년까지 국비와 지방비를 합한 93억원을 들여 가톨릭 타운을 덮고 있던 베일을 벗겨 내고 일대에 '천주교 순례길'을 만들 계획이다.
천주교 순례길은 지난 2011년 '주민참여 도시학교'에서 만난 남산동 주민들과 학자, 수녀, 공무원 등의 염원이 모여 이뤄진 합작품이다. 이름은 '100년의 향수! 추억의 남산 화원 둘레길'로 붙였다. 가톨릭 타운이 닫힌 공간이 아니라 100년의 향기를 담은 열린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중구청은 둘레길이 시작되는 남산지구대를 시작점으로 수녀원의 길, 인쇄골목, 가톨릭 타운 주변 단장에 나선다. 남산지구대 인근에는 둘레길 상징조형물을 세워 주변 관광지와의 연결성을 강화한다. 수녀의 길 낡은 담장은 가톨릭 역사를 담은 스토리 보드와 경관 조명으로 꾸며 가톨릭 역사를 훑을 수 있는 거리로 변신한다. 주변 인쇄골목과 자동차 부품 골목은 간판 정비 등을 통해 특화 거리로 조성한다. 골칫거리인 불법주차 문제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청과 협의를 거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주차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윤형구 대구 중구청 도시국장은 "가톨릭 타운은 종교를 떠나 번잡한 도심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다"며 "가톨릭 타운 주변을 단장해 가톨릭 타운이 대구 근대골목투어를 잇는 또 하나의 관광의 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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