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뜻있는 인사들이 대한협회를 창립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때였다. 심산도 지금은 글만 읽을 때가 아니라며 분연히 나섰다. 주변 지인들과 함께 대한협회 성주 지부를 선비들이 모이는 향사당에 설치했다. 심산이 총무를 맡았다. 심산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여러 선비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장차 조국을 구하고자 함이다. 조국을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구습의 혁파부터 시작해야 한다. 구습의 혁파에는 먼저 계급타파를 시작해야 한다."
박수치며 환호하는 이도 있었지만 큰소리로 욕하는 이도 있었다. 욕하는 이들에게 심산이 말했다. "일본 순경이 지금 칼을 들고 문 앞에 와 있다. 그들은 도적들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도적들에게는 굽실굽실하며 맞아들이고 도리어 나를 꾸짖는가. 어찌 도적들에게는 겁을 먹고 나에게는 용감한가. 나를 꾸짖는 용기를 도적을 몰아내는데 발휘하라." 고루한 유생들과 심산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다음 해 매국단체인 일진회 회원들이 한일 합방론을 들고 나오자 심산은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며 사람들을 향교에 모이게 했다. 지금 역적들을 성토할 수 있는 방법은 중추원에 건의서를 내는 길뿐이라며 건의서 초안을 보였다. 모임에 올 때만 해도 호응하던 사람들이 과격한 건의서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70명 중에서 고작 세 명만이 건의서에 서명했다. 직접 중추원을 찾아가 전달하고 서울의 각 신문사에 투고했다. 곧 성주주재 일본 헌병분견소에서 네 사람을 연행해 갔다. 헌병소장은 건의서를 분견소를 통하지 않고 바로 중추원에 보낸 일을 따졌다. 심산은 "우리나라 역적을 성토하는 데 일본인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헌병소장은 일진회원들은 천하의 대세를 꿰뚫어 본 인물들이라며 역적이라는 말은 비웃음을 살 뿐이라고 두둔했다. 심산은 "일본인들은 충과 역의 분간을 모르니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 반드시 생겨날 것이고 일본은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요지의 말로 맞섰다. 다음 날은 성주 경찰주재소로 연행됐다. 전날보다 협박과 공갈이 더 거칠어졌다. 헌병분견소와 주재소를 10여 차례 이상 번갈아 가며 연행당했다. 어떤 날은 공갈 대신 갖은 회유로 건의서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심산과 세 사람은 끝내 건의서를 취소하지 않았다. 내 나라를 내가 구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는 심산 일행의 주장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꺾을 수 없었다. 물론 중추원에 올라간 건의서는 내각으로 이첩됐지만 친일 대신에게 묵살됐다. 그 뒤부터 일경은 밀정을 풀어 심산의 뒤를 밟으며 행동을 감시했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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