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진 하늘, 소슬해진 바람. 낯선 계절의 향기가 묻어난다. 그런데 참 좋다. 하양, 분홍, 주황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국화, 천일홍, 맨드라미 등이 가을 내음을 뿜는다. 구절초와 상사화도 앞다퉈 만개해 코끝에 맴돈다. 봄이나 여름처럼 진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렇다고 겨울처럼 탁하지 않다. 향긋하면서도 은은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산과 들, 그리고 유원지나 도심에서도 가을 내음이 뿜어 나오고 있다. 수확을 앞둔 들판의 평화롭고 감미로운 벼꽃 향, 도심의 호텔이나 건물에서는 상큼한 라임향,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는 흔들리는 향초와 함께 은은하게 꽃향기가 퍼진다. 가을을 담은 향수 관련 제품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생활의 냄새(?)에 찌든 집안에도 가을향이 은은히 퍼진다.
◆은은하고 깊은 꽃 내음
화려한 봄향기와 다르다. 은은하면서 깊은 향이다. 가을 꽃들이 향내가 깊은 이유는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우고 오랜시간 준비하여 피워낸 꽃들이기 때문이다. 화훼분재전문가인 김연화 씨는 "가을 꽃은 깊고 은은한 향을 뿜어낸다. 반면 봄에 앞다퉈 피어나는 꽃들에게는 의외로 향기가 거의 없다. 겨우내 푸른 이파리를 내놓았던 보춘화 같은 것들이 향기가 깊지만 이른 봄 꽃을 피운 것들은 향기를 담을 시간까지는 부족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가을 향기의 주인공은 역시 국화. 여름 끝자락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벌개미취, 코스모스는 모두 국화과의 꽃.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알려주는 쑥부쟁이, 구절초 등도 국화과의 꽃. 가을에 피는 꽃은 다른 계절에 피는 꽃보다 향기가 풍성하다. 대부분의 꽃들이 곰취, 해바라기, 털별꽃아배지처럼 가운데 부분에 수없이 많은 꽃을 피워낸다. 한 줄기에 송이송이 작은 꽃들이 피거나 꽃 하나에 많은 씨앗들이 들어 있다. 그래서 향 역시 풍성하다.
국화과의 꽃은 아니지만 오가피도 마찬가지다. 자잘한 꽃들이 모여 핀다. 한 송이만 피워내는 것이 아니기에 이른 봄부터 지금껏 피어난다. 가을에 피는 난초꽃도 색다른 향을 뿜는다. 봄에 피는 춘란에 비해 훨씬 기품있는 향을 간직하고 꽃을 피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화훼원예학과 이대건 겸임교수는 "가을에 피는 난초는 달콤한 감향과 상큼한 청향을 내뿜는 경우가 많다. 봄이나 다른 계절에 피는 꽃보다 숙성된 향이 나온다"고 했다.
◆향기산업, 향기마케팅
가을은 향수의 스펙트럼이 한층 광범위해지는 시기다. 달콤한 과일 향과 플로럴 계열 향은 물론, 봄과 여름에는 다소 무겁고 끈적하게 느껴졌던 머스크, 바닐라, 앰버 향마저도 무리 없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느 향수를 사용하면 좋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질 지경이다. 때마침 가을을 맞아 새로운 향을 담은 향수들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향을 이용한 '센트(scent) 마케팅'도 열풍이다.
새끼손가락 손톱만큼 작지만 어느 조명보다 분위기 있는 주홍빛 불꽃, 타닥타닥 심지가 타 들어가는 소리,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향초는 가을의 운치와 향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필수 아이템. 왁스 종류에 따라 파라핀, 소이 왁스, 비즈 왁스 향초로 구분된다. 대구지역 이마트의 경우 향초, 디퓨저 등의 제품판매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20% 늘었다. 동아쇼핑의 경우 생활용품 전문매장인 모던하우스에서 라벤더, 캐모마일, 로즈 등 아로마 향과, 캔들, 방향제 등 50여 가지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올 상반기 해당 제품군의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2배 증가했다. 모던하우스팀 송재헌 팀장은 "계절적인 요인과 함께 힐링 열풍으로 인해 아로마 관련 제품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향기 디자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소비자 역시 늘고 있다. 향기가 어떤 인테리어 소품보다 드라마틱하게 집안 분위기를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패션업체나 호텔 리조트 등도 향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고객들의 후각을 자극하는 센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1일 방문한 대구 중구 동성로의 한 여성의류매장. 입구부터 꽃 향기가 코를 은은하게 자극했다. 단번에 알아챌 만큼 강한 향을 발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편안한 느낌이었다. 향기가 발산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매장 곳곳에 설치된 검은색 향기 박스가 보였다. 조명 기구와 비슷하게 생겨 일부러 찾지 않으면 몰랐을 것이다.
이 매장의 주인 최영수 씨는 "향기박스를 설치한 후 매출이 조금씩 오르고 있다. 머리카락 굵기의 80분의 1밖에 안 되는 미세한 입자를 매장 곳곳에 분사하고 있다. 손님이 많이 오는 시간대에 자동으로 뿌리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했다. 향기 컨설팅업체도 생겼다. 이들 업체는 매장에 맞는 향기를 찾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나만의 향기를 만든다
고유의 향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백화점과 레스토랑, 호텔 등을 다녀온 뒤 집에서 만나는 '생활의 냄새'. 왠지 집 밖 향기에 대한 그리움이 남는다. 사실 가을만큼 나만의 향기를 피우기 좋은 계절도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더운 열기와 습기 때문에 짜증을 낼 필요도 없고 매서운 추위에 몸을 웅크릴 필요도 없다. 부드러운 장미, 풍성한 자스민 꽃 향기와 함께 나무 향이 어우러진 향기도 좋고 달콤한 과일 향에 떡갈나무의 이끼향. 부드러운 아이리스향…. 나에 맞는 향초나 디퓨저 하나만으로도 나만의 가을 향기를 만들 수 있다.
향기는 그 집의 개성과 색깔을 결정짓지만 다른 인테리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편하면서도 그 효과가 크다는 것이 장점이다. 최근에는 힐링열풍까지 가세했다. 향기가 주는 심신 안정 효과나 스트레스 경감 효과 등이 더해지면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동아쇼핑 모던하우스 김은옥 매니저는 "과거에는 가구나 소품 등에 치중했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장소에 잘 어울리는 향기로 인테리어 효과를 더하려고 한다. 그래서 해외에서 수입해 온 여러 브랜드의 디퓨저와 향초 등을 판매하는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향기로 공간을 디자인할 때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사항들이 있다.
캔들앤솝 홍성호 대표는 "향초의 경우 향이 고루 퍼지려면 1시간 이상 3시간 미만으로 켜 둬야 향이 잘 퍼지면서도 실내 공기를 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 또 끌 때는 입으로 불지 말고 뚜껑을 덮어 꺼야 한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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