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5부-의료 그리고 의료인 <6>경북대 의과대학 재미동창회

눈물 나는 노력 끝에 명망가로…모교엔 장학금 등 '보은'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연호는 방사선과(영상의학과)를 전공한 뒤 미국 의사들과 함께 개업해 명성을 날렸다. 부인 루시 김과 함께 행복한 노년을 보내며, 매년 재미동창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연호는 방사선과(영상의학과)를 전공한 뒤 미국 의사들과 함께 개업해 명성을 날렸다. 부인 루시 김과 함께 행복한 노년을 보내며, 매년 재미동창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2013년 경북대 의과대학 재미동창회에 참석한 여웅연
2013년 경북대 의과대학 재미동창회에 참석한 여웅연'강반 부부가 백운이(사진 왼쪽) 경북대병원장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곳이기도 했다. 미국 이민 1세대는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해서 설움 받고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들과는 달리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이른바 엘리트 이민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대학병원 교수, 개업의로 활동하며 지역사회 명망가들로 자리 잡기까지 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경북대 의과대학 재미동창회원들 중 김연호(1954년 졸업), 여웅연(1960년), 강반(1963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연호 - 모교에 '연호영상연구실' 설치

경북중'고를 졸업한 뒤 경북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원래 1954년 봄에 졸업해야 하는데 군의관이 모자란 상황이어서 1953년 가을에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 일반 병원이나 대학병원 인력도 크게 부족했던 탓에 군의관 근무 후 6개월 만에 다시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 외과에서 인턴 및 레지던트 과정을 거쳤는데, 이성행 교수(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흉부외과를 전공하며 심장수술을 배움)의 소개로 미국에 유학하게 됐다. 그때가 1956년 7월이었다. 처음 유학생으로 왔을 때 먼저 온 사람이 20명 남짓에 불과했다. 나름 동창회를 만들었지만 뉴욕'워싱턴 등지에 국한됐다. 이후에 전체 동창회가 결성됐다.

미국에 와서 보니 가장 부족한 것이 방사선과에 대한 지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새로운 분야인 탓에 이것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과 희망이 생겼다. 처음 워싱턴에서 해부병리학을 공부했다. 사체를 해부하면서 사망에 이르게 한 다양한 병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정 수 이상의 사망자를 해부해야 과정을 인정해주는 규정이 있었다. 1년간 거의 200구가량의 사체를 해부했다. 확인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명에 해당하는 것을 다 봤고 이후 방사선과 전공에 크게 도움이 됐다.

개업의로 활동한 뒤 1997년에 퇴직한 뒤 지금은 조용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미국 진출 후 20~30년이 흐른 뒤 동문들이 안정되면서 모교에 은혜를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장학금도 조성하게 됐다. 1992년 경북대 의과대학 진단방사선과교실(현 영상의학교실) 발전을 위해 2만달러를 기부, 현재 의학영상연구소 내에 '연호영상연구실'을 두게 됐다.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자기 스스로를 내세우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여웅연 - 시카고대 핵의학과 교수로 근무

1960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965년 10월 미국에 건너갔다. 1967년 경북대 의과대학 생리학 교실에 교수직이 생겼다는 연락이 왔다. 뉴욕대 생리학교실에서 한창 심장 생리를 연구하던 중이었다. 1년6개월밖에 안됐는데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2년 정도만 더 있으면 학위를 받을 수 있고, 나중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모교에서는 강의할 사람이 없다고 계속 채근하는 바람에 결국 돌아왔다. 1967년 2월에 한국에 돌아와 3월에 의과대학에 첫 출근했다. 미국과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실험기구는 낡고 고장 나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재료들을 사 모아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갈등 때문에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결국 1969년 10월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로 가게 됐다. 당시만 해도 기초의학만 했기 때문에 네브래스카대 측은 임상실험을 위해 인턴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3개월 조교수, 3개월 인턴을 번갈아가며 생활했다. 밤에 응급환자 발생 연락이 오면 무조건 달려나갔다. 간호사와 영어로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로 주고받기보다는 차라리 직접 가서 환자를 보는 것이 편했다. 거의 매일 이런 일이 반복됐다. 생쥐실험을 워낙 많이 했던 탓에 정맥주사는 정말 쉬웠다. 응급실 간호사들 사이에 정맥주사의 달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비록 의사소통은 쉽지 않았지만 가장 성실한 인턴으로 평가받았다.

미국에 다시 돌아간 뒤 미시간대에서 핵의학을 전공하게 됐다. 당시 핵의학이 새롭게 등장해 각광받기 시작하던 때였다. 1973년 핵의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뒤 자리를 옮겨 시카고대 핵의학과에서 근무했다.

시카고 한인회 활동도 했다. 1974년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시카고에서 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다. 교민 응원단이 무려 1천500여 명이나 찾아왔다. 맨 앞자리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는데, 이튿날 병원 동료가 네가 신문에 났다며 했다. 농담 말라며 웃어넘겼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시카고타임즈 스포츠면 1면에 응원하는 모습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강반 - 알레르기'면역학 분야의 대가

알레르기'면역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강반(1963년 졸업)은 여웅연의 아내다. 졸업 후 외국 의과대학 졸업자를 위한 평가시험인 'ECFMG'에 합격한 뒤 뉴욕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인턴과정을 마칠 병원을 부탁했다.

이듬해인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날아온 편지에 적힌 주소와 이름이 온통 영어로 돼 있던 탓에 한참이 걸려서야 뉴욕 퀸즈병원의 인턴 합격 통지서가 전달됐다. 미국에 갈 날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미국에 가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집안에서도 머나먼 타국 땅에서 공부하려는 딸을 반대했다. 하지만 약속을 안 지키는 한국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기 싫었다. 아울러 선진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책으로 영어를 공부했을 뿐 미국 사람과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었다.

1년간 인턴 생활을 하면서 하룻밤도 편하게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밤에 대여섯 차례씩 응급환자 때문에 전화가 왔다. 영어로 환자 상태를 묻고 지시하는 일은 버거웠다. 직접 가서 환자를 보며 설명을 듣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응급실 의료진은 한국 의사의 부지런함에 탄복했다. 그러면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며 칭찬했다. 비록 더듬거리면서 말을 건네고 잘 알아듣지 못해 힘들었지만 교과서에서 배운 영어 그대로를 구사한 덕분이었다.

여웅연과 강반은 시카고에서 오랜 기간 의사 생활을 한 뒤 현재는 플로리다주 올랜도 북서쪽에 있는 인구 5천여 명의 작은 도시인 리칸토에서 살고 있다. 1989년(여웅연), 2000년(강반) 두 차례 재미동창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던 부부는 매년 동창회 장학금으로 1만달러를 기부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모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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