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바람의 장례식 3-정용주(1962~)

찔레 덤불 저편으로

노랗게 피어 있는 죽도화

억세진 풀 헤치고 들어가니

작은 도라지밭

노인 내외가 흙을 턴 손으로

소보로빵을 떼어 먹으며

페트병에 든 물을 건네 마시다

마침 빵을 다 먹어 어쩌냐는 듯

도라지밭 가장자리

장맛비에 쪼그라진 토마토

두 개 따 손으로 문질러 건넨다

삶을 얼마나 삭혀내야

내 것을 미안하다는 듯이

남에게 건넬 수 있나

만개한 철 지나 찔레 덤불숲에 핀

죽도화 몇 송이 외따로 적막하다

-시집 『그렇게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된다』(시인동네. 2013)

'찔레 덤불숲'을 울타리 삼은 밭에서 하루를 보내는 노부부와 그 속에서 마지막 꽃송이 몇 달고 있는 죽도화의 모습이 닮았다. 죽도화 질 무렵이면 찔레꽃은 만개할 즈음일 터. 찔레에게 자리를 다 못 비켜주고 서성이는 죽도화의 마음과 토마토 두어 개 건네는 노부부의 마음 또한 서로 닮았다. 그저 미안하다.

"내 것을 미안하다는 듯이/남에게 건넬 수 있는" 마음을 생각해 본다. 받는 사람 몰래 선물을 건네는 마음도 아름답지만, 어쩔 수 없이 직접 건네면서 그저 미안해하는 이런 마음 또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문득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 빵을 베물다가 눈물 그렁한 눈빛과 마주치고는 침이 묻은 부분을 떼어내고 나머지를 건네던 그 손길, 누군가 여름 햇살에 달아오른 토마토를 따서 바지춤에 닦아 주던 그 손길,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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