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이 이틀 남은 12월 30일 아침 고하 송진우가 자택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임정 측과 신탁통치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인 직후였다. 고하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내놓고 찬탁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군의 주둔 필요성을 강조한 그는 공산주의 정권을 막으려면 일정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각적인 정권 인수를 희망하며 반탁에 나선 백범 등 임정 요인들과 마찰이 불가피했다.
해방 초기만 해도 고하는 임정법통을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이었다. 여운형과 박헌영이 건준 참여를 제의하자 그는 임정이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의 환국 이후 고하의 생각은 변했다. 임정요인들의 환영회 자리에서 신익희가 해방 전 국내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비판했다.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는 지적이었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고하가 나섰다. 그는 "국외에서는 배가 고팠을지는 모르나 마음의 고통은 오히려 적었을 것"이라며 "환국했으면 모두 힘을 합쳐 건국에 힘 쓸 생각이나 먼저 하라"고 충고했다. 이후 친일파 문제 등을 놓고 고하와 임정 측의 갈등이 적지 않았고 고하의 임정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항일 투쟁에 있어 임시정부의 공과 정통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비록 일제말기에는 중국 전역을 유랑해야 할 처지에 빠져 활동조차 미미했지만 대중들에게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투쟁의 상징이었다. 일제와의 투쟁을 놓고 임시정부와 비교될 만한 국내 세력으로는 그나마 공산주의자들이 꼽혔다. 방법은 달랐지만 일제와의 투쟁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길을 걸었던 공산당과 임시정부는 해방정국에서 대중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로 변했다. 박헌영은 개인적으로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애국자라고 존중했지만 정치적 판단으로는 대중과 분리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대중의 지지를 놓고 경쟁을 벌인 것이다.
미군정은 애당초 중경 임시정부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고 부자들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 역시 임정 세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국내에서 일제와 타협하며 살아 온 한민당 사람들과 배를 곯아가며 일제와 싸워 온 임정 요인들의 시각 차이는 적지 않았다. 이승만과 손잡은 한민당은 임정 요인들을 국수주의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한때 한독당과 한민당의 통합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성사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대중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임정 세력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미국과 한민당은 물론 공산당 등 여타 세력들의 경계가 한몫을 했다. 임정의 상징이던 백범은 1949년 6월 자신이 거처하던 경교장에서 통일조국의 염원을 품은 채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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