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에 얽힌 추억은 누구든 하나쯤 있다. 중장년층이라면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세발자전거, 고(故) 곽지균 감독의 영화 '겨울 나그네'(1986년 작), 록그룹 퀸의 '바이시클 레이스'(Bicycle Race)가 떠오를 것이다. 젊은 층이라면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는 광고 카피부터 생각날지 모르겠다. 15세기에 오늘날의 자전거와 흡사한 '탈것'의 스케치를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다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 저서 '역사의 연구'를 쓰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을 자전거로 답사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의 천재성이 갑자기 부러워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이라면 평생 잊지 못하는 공통의 기억도 있다.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 타기에 처음으로 성공했던 그 순간이다. 자신의 삶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면,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셔본 지가 가물가물 하다면 그 '자유'를 떠올리며 페달을 밟아보자. 지금은 자전거와 잘 어울리는 가을이다.
◆자전거를 위한 특별한 공간
운전자들에게 고급 수입차는 '공포'의 대상이다. 자칫 한눈팔다가 접촉 사고라도 내면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여름에는 경차 운전자가 외제 차량을 들이받고 도주하다 빗길에 차량이 미끄러지며 전복돼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입 세단 못지않은 몸값을 자랑하는 럭셔리 자전거도 등장, 운전자들이 더욱 조심해야 할 듯싶다.
13일 찾은 대구 수성구 중동의 수입 자전거 전문점 '파라마운트'. 대구의 자전거 동호인이라면 거의 다 안다는 이곳에는 국산 중형 승용차 가격보다 더 비싼 '명품'들이 넓은 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최고가 제품은 4천만원을 호가한다. 1천800만원짜리 독일산 프레임과 1천만원짜리 휠세트(허브'림'스포크), 100만원짜리 안장 등 최고급 부품을 조립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무게 역시 6㎏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 성인이 한 손으로 들 수 있다.
이탈리아 유명 자전거 브랜드의 자전거는 가격이 2천100만원 정도다. 전 세계에 70대뿐인 70주년 한정판 모델이다. 젊은 층과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접이식 미니 벨로(바퀴 20인치 이하) 자전거 역시 비싼 제품은 300만원대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격대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헬멧 40만원, 상의 30만원, 재킷 80만원, 클릿 슈즈 40만원, 고글 40만원 등 고급 제품으로 갖추려면 의복비만 2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와이파이가 탑재된 자전거용 블랙박스, 속도계 등 안전용품도 인기다. 매장 관계자는 "가장 많이 찾는 자전거는 1천만원대로 30~50대 남성이 주요 고객"이라며 "최근에는 부부가 함께 구입하거나 혼자 오는 여성 고객도 꽤 있다"고 소개했다.
고가 자전거들은 티타늄'카본 등 가볍고 좋은 첨단소재를 쓰기 때문에 비싸다.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저렴한 생활형 자전거로도 충분히 라이딩(riding'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차 한잔을 마시며 라이더(rider)로서의 철학과 문화,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자전거 카페가 제격이다.
지난 5월 대구 중구 북성로에 문을 연 '장거 살롱'은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고 있다. '장거'는 자전거의 경상도 사투리다. 맞춤형 자전거 제작'수리 등을 할 수 있는 'DIY 바이크 센터', 목공소인 '파레트', 작가들의 작업 공간이 함께 둥지를 틀고 있다.
예비사회적기업인 이곳에서는 카페 이름에 걸맞게 커피를 마시며 고장 난 자전거를 직접 고칠 수 있다.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하다면 주인장 전수윤 씨가 도와준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음료수의 가격을 500원 할인해주기도 한다. 현재는 내부 리모델링 중으로 이달 말쯤 다시 열 예정이다. 전 씨는 "어려운 이웃에게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휠체어처럼 몸에 맞는 자전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거 살롱 운영을 시작했다"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공유경제의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볼까? 출퇴근도 OK!
자전거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영국 BBC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산업혁명 이후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됐다. 컴퓨터, TV, 자동차 등도 자전거를 앞지르지 못했다. 자전거만이 갖고 있는 불가사의한 아날로그적 매력 때문이다.
도심 거리와 아파트 숲 사이에서도 자전거의 매력은 빛난다. 그러나 아무래도 라이딩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면 시원하게 뚫린 교외 자전거 전용도로가 낫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강변에 만들어진 국토종주 자전거길(1천757㎞)은 한국의 국토를 동서와 남북으로 연결한다. 곳곳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저렴한 가격에 자전거와 안전장비를 빌릴 수도 있다. 이 가운데 낙동강 자전거길은 안동댐에서 시작해 영남 내륙의 유서 깊은 마을들을 거쳐 부산 을숙도까지 389㎞를 잇는다.
국토 종주를 위한 스마트폰 앱도 나와 있다. 안전행정부가 내놓은 '자전거 행복나눔'은 국토종주 자전거길과 10개 지자체 명품길에 대한 지도 정보, 접근 경로, 주변시설 등을 담고 있다. 목적지까지의 길 찾기, 과속 위험'추락'낙석'미끄럼주의 구간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기능도 이용할 수 있다. 대구자전거타기운동연합본부 윤혜정 팀장은 "앱을 이용해 국토종주 자전거길 인증도 가능하다"며 "정보를 잘 활용한다면 그냥 달리는 것보다 훨씬 알차고 즐거운 자전거여행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대구시내에도 자전거를 타기 좋은 코스가 많다. 강정고령보 코스는 자전거를 가지고 대구도시철도 2호선 강창역이나 대실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신천 자전거길을 이용하면 자전거로 목적지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 강정고령보 주변에는 대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상하고 있는 낙동강권역 물문화관인 '디아크'가 있다.
금호강변 자전거길 가운데에서는 북구 노곡동 하중도를 비롯해 동촌유원지, 동촌보도교 등이 손꼽힌다. 사계절 생태관광 학습장소로 자리 잡은 안심 습지, 고모 간이역도 가을날 정취를 더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밖에 2012년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선정된 '살림길'은 낙동강, 금호강, 신천뿐 아니라 대구스타디움, 대구공항, 경북도청, 대구역, 반월당, 두산오거리 등을 한 바퀴 도는 도심 순환 자전거길로 인기를 얻고 있다. 대구시 권삼수 교통관리과장은 "지난 추석 명절을 맞아 수변 자전거길을 일제 점검하고 정비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자전거는 인간적인 도구이다. 인간 체내의 탄수화물을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통'환경'에너지'건강에 모두 도움이 된다. 최근 '자출족'(자전거 출퇴근족)이 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구시청에는 '자타공인'이라는 자전거 동호회가 4년째 활동하고 있다. '자전거 타는 공무원 모임'이라는 이름처럼 회원 57명 대부분이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매월 한 차례 월례회를 여는 것은 물론 수시로 '번개 라이딩'을 갖는다. 올해 목표는 30곳에 이르는 '대구관광 스탬프 트레일'을 완주, 대구 홍보명예대사가 되는 것이다. 모임 총무를 맡고 있는 김채환 환경정책과 주무관은 "동구 동호동 집에서 금호강을 따라 시청까지 자전거로 오면 5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아침저녁으로 전신운동을 하는 만큼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자전거 예찬론을 폈다.
◆인프라 확충도 중요하지만 인식 개선부터
자전거 마니아들이 늘어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관련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대구의 자전거 전용'겸용도로는 216개 노선에 710.25㎞에 이른다. 자전거 안전교육장은 신천 희망교'서구 상리공원'달서구 청소년수련원 등 3곳이고, 자전거 주차장은 대구역(180대)'동촌역(160대) 등 2곳에 마련돼 있다. 자전거 보관대는 모두 1천78곳 1만4천486대 규모다. 대구시는 에너지 절약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시민실천운동으로 '자전거 마일리지 제도'(http://www.ecobike.org)도 운영하고 있다.
대구도시철도공사는 시민들의 자전거 이용 편의를 위해 지난달부터 '무료 대여 자전거 회원 등록제'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총 32개 역에 766대의 무료대여 자전거를 운영하고 있다. 자전거 보관대와 역세권 내 자전거길 안내도, 대구시 자전거길 안내도, 공기 주입기 등도 비치했다. 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만 15세 이상의 자전거 운전이 가능한 신체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용 가능하며 무료대여 자전거 운영역을 방문해 회원가입 신청서(신분증 소지 후 최초 1회 작성)를 작성하면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내년에 개통하는 도시철도 3호선에도 평균 770m 간격으로 설치되는 30개 역사마다 적게는 20대, 많게는 120대까지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된다.
대구는 자전거의 통행수단 분담률이 3.0%로 전국 광역시 가운데 가장 높다. 대구시내 자전거는 총 69만여 대로 추산되며 행정구역별로는 달서구 14만6천 대, 북구 13만2천 대, 수성구 12만1천 대, 동구 11만1천 대 순이다.
문제는 자전거 이용이 활성화되면서 자전거 교통사고도 덩달아 늘고 있다는 점이다. 자전거가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인 대구의 교통사고는 2007년 894건, 2008년 1천40건, 2009년 1천303건, 2010년 1천158건, 2011년 1천354건, 2012년 1천391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사망자 역시 2007년 14명에서 지난해는 22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대구 구'군별 자전거 교통사고 건수는 북구 327건, 달서구 306건, 수성구 202건 순이었다. 특히 북구와 달서구는 국회 박수현 의원(민주당)이 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서 자전거 사고가 가장 많은 지방자치단체 1위(2007~2011년 누계 1천323건)와 3위(1천229건)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았다. 교통사고 경험이 몇 차례 있다는 대구자전거타기운동연합본부 윤혜정 팀장은 "자전거도로를 확충하는 등 인프라 구축도 중요하지만 자전거를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운전자와 자전거 이용자의 인식 개선을 위한 대책 수립이 더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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