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노래 '아리랑 술집'의 가수 김봉명(상)

'눈물과 한숨도 잊자, 술잔 속에 꿈을 띄워 부르자'

나라의 주권을 제국주의에게 강탈당하고 우리 민족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의식주의 기본권조차 누릴 수 있는 기회와 권리를 잃어버린 채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 속에 허덕였을까요? 그 무렵 삶의 고달픔과 근심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도구로는 오로지 술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술을 담그는 재료인 곡식조차 집에 없으니 어쩌다 대면하는 술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박목월(朴木月'1916∼1978)의 시 '나그네'의 한 구절인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표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부터 술을 일컬어 '망우물'(忘憂物)이라 했습니다. 즉 시름을 잊어버리도록 도와주는 물건이라는 뜻이지요. 조선중엽에 엮은 시조집 '동가선'(東歌選)을 읽다 보면 술과 근심의 밀착된 상호관계를 엮어놓은 흥미로운 작품이 눈에 띕니다.

술은 언제 나며 수심(愁心)은 언제 난고/ 술 난 후 수심인지 수심 난 후 술이 난지/ 아마도 술 곧 없으면 수심 풀기 어려워라

작가 이봉구(李鳳九'1916∼1983)도 자신의 '시들은 갈대'란 소설작품에서 '요즘 같은 시절에 술 없이 어찌 마음을 지탱할 수 있겠느냐? 술은 곧 마음을 잡는 약수와도 같은 게다'라고 해서 험한 세월에 술의 덕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겨우 지탱하고 살아간다는 말을 했습니다. 식민지 시절이 바로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이 무렵 술집을 다루고 있는 명편(名篇) 가요들이 몇 곡 나왔었지요. '선술집 풍경'(김해송), '항구의 선술집'(김정구), '술집의 비애'(김복희) 등의 구성진 가락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여기다 진정한 한 편의 술집 테마 노래를 결코 빠뜨릴 수 없으니 그것은 김봉명이 불렀던 '아리랑 술집'입니다.

추억도 맡아주마 미련도 맡아주마/ 어스름 하룻밤을 술집에 던지고

잔 속에 노래 실어 부르자 부르자/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술잔은 몇 굽이냐

눈물도 이리 다오 한숨도 이리 다오/ 조각달 내 신세를 타관에 뿌리고

잔 속에 꿈을 띄워 부르자 부르자/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눈물은 몇 섬이냐

-'아리랑 술집' 부분

가수 김봉명(金鳳鳴'1917∼2005)이 부른 이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음미해보노라면 그 힘든 시절에서도 삶의 여유와 의젓한 배포가 느껴집니다. 시적 화자가 지금 머물러 있는 허름한 술집에서는 쓰라린 추억도 애달픈 미련도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모두 맡아줍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각 소절의 끝 부분인 '아리랑 술잔' '아리랑 눈물' '아리랑 고개'입니다. 여기서 '아리랑'으로 표현된 본뜻은 우리 국토와 민족입니다. 2절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흘린 눈물이 대체 몇 섬이나 되느냐라고 식민지 백성의 삶과 고통의 사연을 웅변적으로 되묻고 있습니다. 김봉명이 발표한 노래가 모두 9곡밖에 되지 않는데 그 적은 분량의 노래 가운데 이러한 명곡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은 김봉명은 191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김용환(金龍煥)인데 그가 빅타레코드사에 처음 전속이 되어서 입사했을 때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같은 이름의 선배음악인 김용환(1909∼1949)이 이적해 와서 결국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예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빅타레코드사는 황금심(黃琴心'1912∼2001)과 박단마(朴丹馬'1921∼1992)라는 간판격 여자 가수는 있었지만 남성 가수진이 부족했습니다. 그리하여 1938년 대구에서 신인콩쿠르를 열었는데 그때 1등이 정근수(鄭槿秀), 2등이 김봉명이었습니다. 정근수는 가수 정훈희(鄭薰姬)의 부친으로 빅타에서 1939년 '가거라 청색차'란 노래를 취입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그 길로 가수생활을 접고 연주자의 길로 진로를 바꾸었지요. 그 음반의 다른 쪽 면에는 김봉명의 '깨여진 단심(丹心)'이 실렸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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