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시간대를 찾는다면 김묘선(39) 씨의 목소리는 '아침형'이다. 매일 오전 7시, 차에 시동을 켜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아침잠을 깨우는 상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라디오는 상상의 매체가 아니던가. 라디오 속 목소리만 듣고 김 씨가 밝고 경쾌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대구MBC 라디오 (주파수 95.3㎒) '김묘선의 FM모닝쇼' (이하 모닝쇼) 진행자인 김 씨를 17일 월요일 오전 9시 30분, 방송을 막 끝낸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아침 출근길 만나는'토끼 가족들'
아침과 월요일은 닮았다. 아침에 일이 꼬이면 온종일 기분이 찜찜하고, 월요일 기분이 엉키면 금요일까지 그 여파가 이어진다. 그만큼 시작이 갖는 의미는 크다. 월요일 아침을 김 씨와 인터뷰로 시작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는 '아침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이어지는 아침 방송을 7년째 하면 지칠 법도 한데 힘든 내색이 없다. "예전에 저녁 방송도 해봤는데 저는 아침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처음엔 아침잠이 많아서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람을 깨우는 기분이 정말 좋아요."
모닝쇼 청취자들은 서로 알아보는 표시가 있다. 바로 '토끼 스티커'다. 숫자 '95.3'과 함께 토끼 스티커를 붙인 차량을 목격한다면 경적을 가볍게 누르며 아는 척을 해도 된다. 스티커의 기원은 이러했다. 오전 7시에 시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특성상 청취자들도 매일 아침 비슷한 출근 시간에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범어네거리, 수성교처럼 항상 지나는 그 길에서 똑같은 차량을 볼 때마다 '혹시 저 사람도 모닝쇼 듣나?'하고 궁금해하는 청취자들이 많았다.
"매일 출근길 운전을 하다 보면 같은 길, 같은 도로를 지나잖아요. 특히 봄, 여름에는 차창을 열고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아 모닝쇼 라디오 소리가 밖으로 다 들리는데 반가워도 말도 못하고요. 그래서 청취자들이 '토끼 가족'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만들자고 제안한 거죠." 토끼띠인 김 씨를 모티브로 탄생한 토끼 스티커는 지금까지 5천 장 배포됐다.
스티커의 위력은 엄청났다. '소나타 XXXX번 토끼 발견'같이 문자 메시지 사연이 오는 것은 이제 일상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같은 라디오를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각박한 사회에서 정(情)을 베풀기도 했다.
애청자인 한 버스 기사는 여자 3명이 탄 차량 뒷바퀴에 펑크가 난 것을 목격한 뒤 처음에 그냥 지나치려다가 토끼 스티커를 보고 뒤따라가 "조심하라"며 알려줬고, 한 중고차 딜러는 차 팔러온 사람이 토끼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유로 50만원을 더 쳐주기도 했다. 하나씩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김 씨는 "토끼 가족들끼리 단결이 잘 된다. 끼어들기 할 때 잘 끼워주고, 불법 유턴하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면 문자 사연으로 신고하고, 선진 교통 문화에도 이바지한다"며 가족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예산 부족(?)으로 5천 장 한정 수량만 스티커를 배포하자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열혈 애청자가 다른 차에 붙어 있는 토끼 스티커를 떼가는 모습이 차 블랙박스에 찍혔고, 문자 사연으로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김 씨는 "한 번 붙였던 것을 다시 쓰면 접착성이 약해지는데 정말 토끼 스티커가 갖고 싶었다 보다"고 웃어넘겼다.
◆서울 여자, 대구 DJ로 터잡다
그가 라디오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9년. 원래 '서울 사람'이었던 김 씨는 대구에 사는 사촌의 권유로 대구MBC TV 리포터에 지원했다. '친구 따라 오디션 봤다가 덜컥 연예인이 됐다'는 사례는 아니었다. 대학 시절부터 모 방송국에서 리포터로 경력을 쌓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모닝쇼와 인연이 닿아서 6개월간 라디오를 진행했고, 낮 방송과 저녁 방송, 여기저기 시간대를 옮겨가며 라디오 DJ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평범하지 않은 이름 탓에 목소리와 함께 듣고 알아보는 경우도 많다. "그냥 목소리만 들으면 잘 모를 텐데 이름을 보고 알아채는 분들이 많아요. 며칠 전에 집에 TV를 고치는 기사분이 오셨는데 '혹시…'하고 묻는 거예요. 택배 기사분들도 그렇고. 사람들이 '혹시~'하고 물으면 목소리를 쫙 깔고 '아닌데요(저음으로)'라고 하죠."
이제 라디오는 그의 삶 일부가 됐다. 김 씨가 생각하는 라디오의 매력은 뭘까. "청취자들을 엿보는 느낌이에요. 나는 사연을 읽어주는 것뿐인데 중간에서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해요. 또 피드백이 바로바로 오는 것도 라디오의 매력이에요. 사람들이 쫑긋 토끼 귀를 세우고 내 이야기에 반응하니까 참 재밌어요."
라디오 DJ 경력만 14년 차, 2008년 모닝쇼에 복귀한 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는 김 씨는 '베테랑' 급이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 만나 지금 DJ를 할 수 있는 것 같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김 씨는 스스로를 "구멍이 많고, 실수투성이에 감정 기복이 심한 DJ"라며 "라디오를 하면서 자신을 메워가는 느낌이 든다"고 표현했다.
"DJ가 청취자에게 뭔가 가르치려 드는 '교육적인 느낌'의 방송은 싫었어요. 저는 완전 '무한도전급'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DJ이에요. 토끼 가족들에게 항상 많이 배워요. 어떤 주제를 던지면 기발한 생각과 아이디어가 바로 문자로 날아와요. 방송을 만드는 건 청취자들이에요. 80년대에 DJ했다면 이렇게 못했을 텐데. 하하."
라디오 말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봤다. 김 씨 블로그를 염탐했던 기자는 '맛집'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운을 뗐다. 그는 요리를 좋아한다. 김 씨는"양념게장과 간장게장도 만들 줄 알고, 얼마 전에는 김장도 해봤다"며 자랑했다. 그가 좋아하는 라디오와 요리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죠. 또 청취자, 먹는 사람의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내가 직접 나서서 일해야 한다는 매력이 있죠." 앞으로 그가 청취자들과 함께 '요리'할 라디오가 기대된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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