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18세기 말,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세계관이 빠르게 변하자 그 변화를 수용하고 유연하게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물러나 세상을 경계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고, 이에 따라 1869∼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공의회는 불안한 세계정세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교황직에 대해서만 다룬 채 중단됐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뒤인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에 위기가 없는데 왜 공의회를 소집하느냐?'는 질문에 "창문을 열고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공의회의 목표는 '회개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얼굴을 한 교회,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교회,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공의회의 결과는 나라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을 중심으로 변화와 쇄신, 반성을 통해 '세상 속의 교회'로 거듭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사회의 지도자로서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치를 확고히 세웠다.
그 결과 추기경은 오늘날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교회 일치운동으로 한국 천주교회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도록 했다.
▷사회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암울한 한국 근대사를 겪어온 김수환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으로 한국교회의 쇄신을 단행했다. 교회는 이웃과 사회,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중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소외됨 없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도구이며, 또한 이를 나타내는 표지여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추기경은 '세상 속의 교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라고 강조했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이듬해인 1970년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메시지를 통해 종교계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젊은 추기경의 이 목소리는 이후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시대를 향해 발언하며, 시대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개헌을 준비하던 1971년, 김수환 추기경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명동성당 성탄 미사에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정권은 방송국에 방송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지만 이미 전파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가톨릭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압박이 노골화되었다. 김 추기경은 유신이 단행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등 시국이 어수선했던 1974년 성탄절에는 "정치와 언론의 자유가 침해된 곳에 종교 자유만이 따로 건재할 수 없다."라며 종교의 사회 참여 필요성을 재천명했다.
이른바 '3'1 명동사건'으로 김대중 씨와 문익환 씨, 함세웅 신부가 구속되자 추기경은 1975년 3월 시국기도회에서 "의견이 다르다고 사람을 단죄하고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라고 유신정권에 대해 단호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추기경의 이 같은 메시지는 한국 가톨릭이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출발이 됨과 동시에 교회가 사회 속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교회 최초의 시국담화
김수환 추기경은 주교 신분이던 1968년 2월 9일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했다.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나섰던 것이다.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 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끌어안았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던 시절에도 추기경은 그들을 껴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 추기경이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개입,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교서'를 발표한 것은 한국교회의 첫 사회적 발언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은 향후 1970, 80년대 가톨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8년 인천 동일방직 여공들이 명동성당에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자 추기경은 그들을 도와주었다. 추기경이 그들을 감싸자 노동자들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명동성당을 찾아와 기댔고, 명당성당은 1990년대 중반까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추기경의 이 같은 모습은 '명동성당'의 이미지를 다르게 보이게 했다. 교회가 아니라 마치 사회문제해결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추기경은 사회문제를 키우거나 문제를 들쑤시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따라서 추기경이 지키려고 한 것은 노동자 개인을 넘어 사회정의와 인간의 기본권이었다. 그가 사회참여를 부르짖으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았던 것도 '어느 한 쪽을 편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기본권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승리의 물꼬
김수환 추기경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들을 숨겨준 교회에 쏟아지는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5공화국 정권은 신문방송을 동원해 연일 '가톨릭 때리기'에 나섰다. 이때 추기경은 "교회로 피신한 이들을 숨겨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 행동은 사제로서 정당했다" 며 의연하게 맞섰다.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의 물꼬를 튼 업적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4'3 호헌조치, 노태우 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체육관 선거 등으로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이때 대학생들이 '6'10 규탄대회'를 마치고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으로 피신해 들어왔다. 당시 정부 고위 당국자가 경찰력을 투입할 것임을 통보하자 추기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이오. 그다음에는 농성 중인 신부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수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오.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소.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시오."
명동성당 앞 대치는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가느냐,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벌인 '기 싸움'과 같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물러섬 없는 단호한 모습에 정부 당국은 학생들 안전귀가를 보장하고 경찰력을 해산시켰다. 이어 국민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런가 하면 추기경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정국 때 촛불시위를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국가보안법이 존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진보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나는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의 마지막 사회참여는 장기기증 서약이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각막을 기증해 빛을 전하고 선종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